[NK 휴먼스토리]숙청된 친구 위해 천리길 찾아준 벗들

“오늘부터 대학 다닐 필요 없으니 그리 알고 준비하시오, 절차도 다 밟아 놨으니까.”

1997년 중반쯤이다. 평양 명문대를 다니던 내게 보위지도원의 말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보위지도부에 불려갔던 나는 갑자기 대학을 그만두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보위지도원은 내가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냉혹한 퇴출명령만 내 귓가를 때렸다.

이전에는 평양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가족들이 지방으로 이사한 이후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당시 나는 아버지가 좌천돼 지방으로 내려가야 했던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가족의 지방 이주로 기숙사 생활을 견뎌야 했던 내게 이제는 아예 학교에서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결국 나는 학교에서 퇴학 통지를 받고, 가족들이 있다는 지방으로 가야 했다. 24시간 넘도록 기차를 타고가 도착한 곳은 회령 근처의 이름도 모르는 협동농장이었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지방으로 좌천된 이후 다시 회령으로 쫓겨간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강제 이혼을 당하고 혼자가 된 형님과 어머니가 계셨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숙청된 반체제 인사 중 아버지가 포함돼 있었다는 등 추측 섞인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우리 집안과 내 앞날은 이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는 것이다. 절망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 나는 협동농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사는 것조차 싫어 밥도 먹기 싫었다. 난 왜 이렇게 된 것일까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날 비참하게 만든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했던 만큼 원망도 컸다.

극심한 식량난 이후 감시가 덜하긴 했지만 보위부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보위부의 눈에 띌 만한 일은 안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당연히 우리 가족에게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말이다.

북한과 같은 폐쇄된 사회 안에서도 고립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고 말을 건네지 않는 자의 슬픔은 사뭇 무인도보다 더 큰 고통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들이 우리를 만나기 위해 회령에 찾아왔다. 그분들은 몇 시간에 거쳐 회령까지 찾아와 쌀과 식용유, 옷가지와 돈을 쥐어주고 가셨다.

북한에서는 숙청당한 사람에게는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특히 반체제 인사라는 소문까지 돌던 친구의 집에 찾아가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남한에서는 그런 행동을 ‘도의적이고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표현할지 모르지만, 북한에서는 ‘반혁명분자’를 감싸고 돈다며 모진 비판을 당하게 된다.

당시 북한은 심각한 전력난으로 기차 속도가 떨어지고 중간에 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평양에서 기차로 회령까지 온다는 일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또 국경지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평양처럼 통행증을 하나 더 발급받아야 한다.

게다가 당시는 극심한 식량난으로 평양 시민도 굶는 일이 허다했다. 아버지 친구분들은 어머니 손을 잡고는 “큰 일은 못 도와줘도 쌀은 얼마라도 도와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따뜻한 미소로 격려를 해주셨다.

그 어려운 때에 숙청당한 친구의 집을 찾아와 준 그 분들을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우리 가족들을 돕기 위해 그 혹독한 시기 평양에서 회령으로 찾아온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지금은 남한으로 와 그분들을 만날 수 없지만 당시의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한국에 온지 1,2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지나다니는 가족을 볼 때마다 고향생각에 눈물이 날 때가 있다. 정이 많아 주변에 그렇게 좋은 사람들은 많이 두신 아버지와 지금도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그립다.

어쩌면 이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울 때가 있다.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본지 몇 년이 됐지만, 어머니의 소원은 죽기 전 한번이라도 나를 만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나면 당시에 우리집을 찾아주신 고마운 아버지 친구분들의 안부를 묻고 싶다. 이제 내가 그분들을 도울 수 있을 때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란다.

한성주/2004년 입국·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