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휴먼스토리] ‘200kg 석탄 구루마’와 사투 벌인 12살 꼬마의 상처

▲ 장마당에서 떠도는 꽃제비들

300만 명이 아사한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라 불리는 최악의 경제난으로 배급은 완전히 중단됐다. 때문에 장사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됐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각자가 알아서 식량을 구해야만 했지만, 모든 경제 수단이 국가에 속해 있어 사람들은 각자가 내놓을 수 있는 물건을 들고 장마당(시장)에 나왔다.

당시 우리 집안은 추방당해 아버지가 함경북도 회령시에 위치한 궁심탄광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석탄 장사였다. 아버지께서 탄광에서 석탄을 캐오면 난 그 석탄을 가지고 장마당에 팔러 갔다.

그 때부터 궁심탄광에서 회령시 장마당까지 30리나 되는 길을 200kg이 넘는 석탄 구루마(수레)와 함께 걸어 다녔다. 아침 일찍 출발해 석탄을 팔고나면 저녁 늦게야 돌아오곤 했는데, 무거운 석탄을 실은 구루마는 나게는 너무나 버거운 존재였다.

특히 북한의 대부분의 도로가 비포장 길이어서 구루마와 함께 지쳐 쓰러질 때도 많았고, 때로는 너무 힘들어 비닐을 뒤집어쓰고 산에서 잔적도 많았다. 그 때 내 나이가 12살 무렵이다.

그렇게 2년을 200kg의 석탄을 실은 구루마와 사투를 벌였다. 죽도록 일해도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보다 굶을 때가 더 많았고, 심지어는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도 장사에 나갈 수밖에 없는 고통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석탄 장사를 키워보려고 친척에게 돈까지 빌려 일을 키워보았지만 시도는 헛되이 끝나버렸다. 결국 우리 가족은 원금까지 다 잃고 빈 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에 낙심해 더 이상 일어설 힘을 잃어버리셨는지,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하늘만 쳐다보셨다. 결국 98년 초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청진으로 기차달리기를 하러 가신다고 했지만, 예정된 기한이 한참 지나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도 아무런 말없이 어디론가 떠나 들어오시질 않았다. 먹을 것이 없었던 나와 동생은 하는 수 없이 집안에 돈이 될만한 물건을 하나둘씩 내다 팔기 시작했다. 결국 돈이 될만한 모든 물품을 내다 팔 때까지 어머니가 돌아오시지 않자 동생과 나는 어머니를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찾는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청진 시내에서 무작정 어머니를 찾아 다녔지만 찾지 못했고, 나중에는 소문을 듣고 남양 장마당까지 떠돌았으나 어머니의 흔적은 없었다.

장마당에서 만난 꽃제비 아이들이 ‘어머니는 중국에 계실 것’이란 얘기를 듣고 나는 탈북을 결심 했다. 하지만 2번의 탈북은 실패로 끝났고, 군인들로부터 ‘장군님을 버리고 떠나려 하느냐’는 비판과 함께 몽둥이 세례만 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이 잘 산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막연한 희망과 함께 결국 두만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중국에서 은인을 만나 연길에 살고 있는 친척을 찾아 갈 수 있었다.

연길에서 또 다른 조선족을 만나게 됐는데 이 분이 내게는 큰 은인이다. 그 분은 중국 공안에게 날 소개시켜 주면서 친척을 찾아 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책임 질 테니 절대 북송하지 말라면서, 내가 친척들을 찾는데 발 벗고 나서주셨다.

나이가 어린 탓이었는지 중국 공안들도 날 귀여워했다. 그 경찰서에서 난 귀염둥이로 떠올랐고, 결국 공안들의 도움으로 사촌형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분들 옆에는 그토록 내가 찾아 헤매던 어머니도 계셨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난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자세히 쓰자면 책 한 권이 모자랄 것이다. 두만강을 건널 때 휩쓸려 내려가다 나뭇가지를 붙잡고 살아나기도 했고, 기차 바퀴 아래 매달려 탈북하려다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장마당을 휘젓다 지쳐 쓰러져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어머니를 찾고 난 후 한 달 간은 내가 태어나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셨다.

동생을 데려오려 다시 북한으로

어머니를 찾은 나는 북에 있는 동생 생각이 났다. 남양 장마당까지는 동생과 같이 다녔으나, 탈북은 혼자 했다. 한 달의 시간이 지난 후, 동생 생각에 더는 편히 지낼 수 없던 난 결국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어머니와 친척 분들께 말씀 드렸다.

친척들은 모두 말렸으나 어머니는 울기만 하시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죽음의 위협을 아셨겠지만 필시 동생 생각에 말릴 수도 없었으리라…나는 중국돈 1,000원을 들고 결국 북한으로 다시 넘어갔다.

북한에서 나올 때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한 번 성공하고 나니 국경을 넘기는 의외로 쉬웠다. 회령의 집까지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갔다.

집으로 돌아가니 아버지께서 동생과 같이 계셨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날 불러 앉힌 아버지는, 나보고 어딜 갔다 왔느냐고 캐물었다.

사실 아버지는 주체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돼 있어 탈북 자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지닌 분이셨다. 어머니께서 말없이 중국으로 떠나신 것도 아버지께 솔직히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내가 중국으로 탈북 했다는 얘기를 미리 듣고 내가 돌아오면 사상을 고쳐놓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계시던 중이었다.

중국에서 한 달 새 너무 잘 먹어 몸이 커버렸기에 사실을 숨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난 절대 중국을 갔다 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속이는 게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 반역자 새끼, 조국을 배반하고 중국으로 탈출한 반역자 새끼”라고 불렀다. 그 날 난 코뼈가 부러졌다. 장군님을 배신하고 떠났다는 것이 내 죄목이었다. 얼굴은 피범벅이가 된 채로 바닥을 뒹굴며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에 불을 지폈다.

동생이 내가 탈북 했다는 얘기를 아버지께 말한 것을 듣고는 동생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완전히 접었다. 내 머리에서 피어오르는 증오심의 대상에는 동생도 포함됐다. 아버지의 무차별적인 폭력은 나를 자연스레 그렇게 만들었다.

그 날 이후 난 집을 나와 중국에서 가져온 돈으로 혼자 장사를 했다.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비참한 기분에, 또 증오심에 혼자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동생이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께 고자질한 동생이 미웠지만 동생을 버리고 가는 게 쉽지 않았다.

2년 동안 장사하며 혼자 보낸 나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날리고 나서는 다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 갔다.

그러나 연길에 있는 친척집에 계실 것으로 생각하고 찾아갔지만 막상 어머니는 그곳에 계시질 않았다. 젊고 예뻤던 어머니가 한족에게 팔려간 것이다.(下편에서 계속)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