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휴먼스토리] 강냉이 한알도 나눠먹던 친구 학주

어린 나이에 탈북했던 나는 2004년도 한국에 입국하면서 중학교 3학년에 편입되었다. 북한의 인민학교를 마치고 고등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기 때문이다.

남한의 학교와 놀이 문화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나이가 어려서 적응이 빠른 편이었지만, 처음에는 정말 어색했다.

남한에 와보니 아이들이 열에 아홉은 모두 PC게임을 즐겼다. 방과 후에 PC방에 가서 노는 문화는 생소함 그 자체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컴퓨터 게임이 아니라 컴퓨터 공부를 해야 했다. 지금에야 게임의 어려운 기능도 곧잘 즐기지만 당시에는 게임을 몰라 대화에 끼기도 힘들었다.

북한에서는 컴퓨터를 볼 일이 없었다.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밖에서 놀았는데, 지금 남한의 40대들의 어렸을 때와 비슷할 것이다. 말뚝박기, 딱지치기, 팽이치기, 썰매타기, 축구, 농구 등이 주종목이었다. 내가 살던 회령은 두만강 근처라 고기잡이도 많이 했다. 고기는 단순히 재미로만 잡지 않았다. 잡은 고기는 구워 먹어서 식사를 해결했다.

당시에 친구들이랑 함께 노는 일의 가장 큰 방해꾼은 배고픔이었다. 뛰어 다니며 노는 것도 뛰어다닐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뛰어 다닐 일 자체가 엄두가 안 생긴다. 친구들이 모여도 아무 힘이 없어 무기력하게 축 처져있는 날이 이어졌다.

배가 고파서 밖에서 노는 것을 대부분 포기했던 날들. 우리는 모여서 그냥 주저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다. 몰래 주워 모은 담배 꽁초를 벅벅 피워대면서 진실 게임을 하고, 삶을 한탄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이야기라도 친구들끼리 하면 재미있었다.

부유한 친구 도움으로 허기 채우기 다반사

패싸움도 곧잘 했다. 맨날 담배 피고 무리 지어 할 일 없이 다니다가 다른 학교 무리와 붙는 일이 많았다. 진짜 과격하게 싸우다 머리가 깨지는 애도 있었는데, 그래도 그 시간조차 내겐 소중했던 건 친구들 때문이었다. 놀 힘조차 없었어도 친구들끼리 있을 때는 그래도 든든했다.

배고파서 놀기 힘들었지만 친구들 도움으로 가끔 재미난 일도 생겼다. 당시 대다수 친구들이 가난했지만 가끔 어머니가 장사를 잘 하신 덕에 부유해진 친구도 있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 그 친구 집에 가서 TV를 봤다.

북한 프로그램들 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봤다. ‘명령027호’라고 인민군 특수부대원이 청와대로 침투하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는데 액션이 꽤나 괜찮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가끔 친구 한 명에게 돈이라도 생기면 우리는 함께 시장을 돌며 군것질을 했다. 옥수수 가루로 만든 ‘펑펑이 빵’이나 두부를 파고 안에 밥을 넣은 ‘두부밥’같은 걸 사먹었다. 양은 적었지만 그래도 나눠먹고, 도와줬다.

친구들 모두가 그랬다. 너무도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혼자 다 먹어도 부족한데, 그 음식을 나눠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집을 나갔다. 그리고 나도 너무 배가 고파 중국으로 넘어갔다. 조선족 친척분을 찾아 대련으로 가던 도중 잡혀서 북송 된 나는, 다시 탈북을 계획하고 한 친구를 찾아갔다. 가장 친한 학주였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태어나고 자란 친구, 배고픈 시절도 함께 견딘 친구였다.

함께 탈북하자고 권유했지만 거절해

학주에게 내 생각을 말하고 함께 도망치자고 말했다. 그러자 학주는 “그래도 내 조국은 여긴데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지, 난 못 가.” 그 친구는 나를 보고 자본주의 물이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격렬한 사상 투쟁을 벌였다.

어렸을 때부터 김정일, 김일성의 혁명역사를 배워온 우리는 조선을 사회주의 지상 낙원이라고 배워왔다. 당시만 해도 바깥 세상을 깨우치진 못한 사람이 꽤 있었다. 장군님에 대한 충성심이 변하지 않던 그 친구는 조국을 떠날 수 없다고 버텼다.

난 중국에서 보고 들은 걸 통해 이미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버린 상태였다. 중국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그 친구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중국이 여기보다 훨씬 풍족하고, 먹을 것이 많다고 했지만, 그 친구는 “그래도 어떻게 장군님과 조국을 버리겠냐”고 했다.

친구는 나와 뜻을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안전과 건강을 걱정해주었다. 그리고 신고하지 않겠다고 말해줬다. “걱정 말고 대신 제발 무사히 가라. 걸리지 말고 무사히 가야 된다”면서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해줬다.

북한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이다. 사람을 믿기 어려운 사회이다. 하지만 난 그 친구를 믿었다. 그 친구가 날 신고하지 않을 줄 믿었기에, 탈북을 감행할 수 있었다.

떠나면서 그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반드시 돌아올테니 다시 만나자”

“반드시 성공해서 다시 돌아올 테니, 그 때 꼭 만나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를 힘껏 껴안았다.

그 때 탈북해서 대련 친척집으로 간 게 98년도였다. 중국에서 3년간은 농사를 짓고, 3년은 식당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계속 살려고 했다. 한국으로 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으로 가면 북한에 돌아가기가 어려워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불법 체류자로 계속 숨어살 수 없었고, 결국 먼저 입국한 형을 따라 2004년도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다.

남한에 와서도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다들 친절하고 좋은 친구들이다. 그러나 솔직히 함께 고생했던 학주만큼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던 시기에 강냉이 한쪽도 나눠먹던 친구들만큼 친해 질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끔 힘든 일에 부닥칠 때면 ‘학주랑 같이 왔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한다. 같이 탈북했다면 중국에서 그렇게 고생하지도, 외롭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 남한 생활도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부탁이라도 그 친구는 들어줬다. 하지만 그 친구는 지금 없다. 그래서 난 대부분의 문제들을 혼자 해결한다. 솔직히 힘들다.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힘들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간다. 지금 먹고 살기도 빠듯하지만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언젠가 다시 북한에 돌아갔을 때 해야 할 일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기업을 세우고, 쓰러진 북한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 도움이 되고픈 게 나의 꿈이다.

무엇보다 그 친구에게 약속했던 것이 있기에 공부를 한다. 고향에 돌아갈 때, 당당한 모습으로 부끄럽지 않게 그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이 지금의 내 목표이다.

최명철/2004년 입국•서강대 중어중문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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