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휴먼스토리]탈북자금 쥐어준 평양의대 출신 고물장수 친구

1994년도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상황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평양 시민이었던 우리 집안은 더욱이 어려움을 몰랐었고, 초급당비서였던 아버지 덕택에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 대부분이 좋은 집안 아이들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 자체가 특권층 동네였고 그래서 배급도 특별히 좋게 나왔다. 특권층만 받던 배급품으로 베게 빵이란 게 있었는데 베게처럼 크고 딱딱한 빵이었다. 쪄서 먹는 그 빵이 유난히 맛있었던 것 같다.

부유한 친구들끼리 대동강으로 피크닉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친구들끼리 조금씩 돈을 모아 고기, 빵, 그리고 술도 몇 병들고 대동강 변에 소풍을 갔는데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며 즐겁게 놀기도 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집안의 배려로 고등중학교 때 성적이 좋았던 난 평양에서 명문에 해당하는 김책 공대에 입학했다. 북한에서는 30명이 졸업하면 단 2명만 대학에 가는데, 그만큼 대학에 가는 사람이 적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나의 대학 입학은 말 그대로 경사였다.

북한은 출신 성분과 토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다. 성적이 좋아도 토대나 성분이 좋지 못하면 명문대학에 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고등중학교를 30명이 졸업하면 20명 정도는 군대에 갔고 그 외 노동자 집안이나 장애인 친구들은 농장이나 공장에 보내졌다. 당시 난 성분도 좋고 공부도 잘했기에 북한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에 입학할 수 있었다.

명문대에 들어간 나는 그 이후 탄탄대로를 밟아나갔다. 김책 공대를 졸업한 나는 전력공업부(한국 전력에 해당)에서 일했는데 대우나 보수가 꽤나 괜찮았다. 내가 하는 일은 전력을 허가 없이 쓰는 공장과 가정집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상이 투철했던 나는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약 3년 간 전력공업부에 있다가 사회안전부(지금의 보안성)에 입대하게 되었다. 안전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연히 친구들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감시하는 직책에 있었기에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당시 안전원들은 북한 주민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안전원 시기는 풍족하면서도 외로운 시절이었다. 사람들의 따돌림 아닌 따돌림을 받으면서 친구 관계는 단절됐다. 안전원들끼리 모임을 가지곤 했지만, 진정한 친구는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곳에서 모든 사람은 경쟁 상대 밖에 되지 않았다.

외롭지만 내 삶은 그렇게 이어졌다. 안전부란 울타리 안에서 난 내부의 사람들과만 어울렸고 투철한 사상으로 외부의 사람을 감시하며 살아갔다. 외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날개없이 추락하던 날들

그러던 내 일생에 변화를 가져 온 건 아버지의 몰락이었다. 당시 북한에는 물건이 부족한 반면 수요가 많아서 어떤 재화나 공장을 두고 벌어지는 암투가 많았는데 아버지께서 그런 일에 연루되셨다. 공장 하나를 두고 벌어진 권력 다툼에서 우리 아버지는 밀려 나셨고 결국 일을 그만두시고 말았다.

그 때가 96년도였다. 이 때부터 내 인생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돈에 쪼들리기 시작했고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전력난 이후 평양조차 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시절에 아버지의 추락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 때부터 내 투철했던 사상은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이후 98년도에는 안전원마저 그만두게 됐다. 세상의 부조리와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하층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면서 배고픔을 알게 됐고 죽을 먹게 됐다. 내 삶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고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을 회의하는 시기가 이 때였다. 하루 하루 먹고 살기가 벅차던 때에 왜 이 세상을 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 생이 허무하게 그냥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변화가 필요했다.

차판 장사로 집안을 먹여 살리던 내 친구

그 때, 내가 밑바닥 인생으로 추락했을 때에 날 도와준 친구가 있었다. 당시 장사를 하고 있던 내 친구 영수였다.

영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였다. 강변에 나가 같이 목욕하고 놀던 친구였고, 같이 학교에서 공부하던 친구였다. 고등중학교 때 한 반에서 6년 동안 생활하며 싸울 때도 같이 싸워주던 친구였다.

30명이 졸업하면 2명만 대학에 갈 때, 나 외에 또 대학에 간 친구가 바로 영수였다. 영수도 공부를 잘해 평양 의대에 갔었는데, 남한으로 치면 연세대 의대에 버금갈 정도로 북한에서는 알아주는 명문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살림 때문에 1년 만에 학교를 그만 둔 영수는 가족 생계를 위해 장사를 했다. 고철과 시멘트 등 고물을 팔아 살아갔는데, 남한으로 치자면 고물 장수에 속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영수는 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줬다. 정말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진정한 친구였다. 다시 만난 영수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안전원이던 내게 다가와준 것 자체가 너무 고마웠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전직 보안서 소속이었던 날 믿어준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영수는 내 현실과 내 고민을 말없이 들어줬다. 내가 체험한 부조리한 현실을 모두 토로했다. 안전원을 하는 동안 쌓인 외로움이 치료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못한 이야기들로 밤을 지새웠다.

그 때 영수와 헤어지면서 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거라고 말했다. 당시 난 탈북을 계획하고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짜고 있던 중이었다.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어서 탈북할 거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먼 길을 떠나고자 했던 내게 친구는 그 때 1000원이란 돈을 빌려줬다. 쌀 1kg이 100원하던 시절이었다. 없는 살림에 그만한 여비를 보태준 친구는 내게 있어서 은혜였다.

친구의 도움으로 탈북

그 때 받은 1000원으로 난 여비를 채울 수 있었다. 치밀하게 탈북을 계획했던 나는 2000년 결국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평양을 떠난 나는 회령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후 중국에서 3년을 머물렀던 난 선교사님의 도움을 받아 몽골을 거쳐 2003년 남한에 들어올 수 있었다.

영수의 도움을 받고 난 후에야 난 진정한 친구가 뭔지 알았다. 사람이 처지가 달라지면 어긋나는 것이 친구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영수는 내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가도, 그 감옥에서 나와도 만날 수 있을 만한 친구였다.

안전원을 하면서 잃었던 것들을 이제는 찾았다.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면서 고등중학교 때 잃었던 친구를 다시 찾았고, 북한을 나와서 세계의 현실에 대해서 바로 눈을 떴다. 옛날 날 가뒀던 사상을 이제는 깨고 일어났다. 옛날의 모습은 이제 내게 없다.

알에서 깨어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간이란 그 둘러싸인 환경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 실감을 한다. 북한이 지금까지도 단단한 이유는 그 오랜 시간에 걸친 사상 교육 때문임을 난 안다.

하지만 난 그 알을 깨고 나왔다. 북한의 인민 대다수도 지금 현재 이런 시기를 겪고 있을 것이다. 현실이 썩을 대로 썩었기에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난 이런 사람들이 모여 북한이 바뀌기를 소망한다.

북한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부조리한 현실이 무너지길 바란다. 그 날이 오면, 날 깨워주고 도와준 친구 영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에 내가 맨 처음 들어가 만날 친구는 바로 영수다. 영수가 준 여비로 이렇게 남한까지 왔지만 영수는 이렇게까지 도움을 준 건 모르고 있을 것이다. 꼭 만나서, 도와주고 싶다. 이번에는 내가 도와줘야 할 차례다.

박성재(탈북자) / 2003년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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