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휴먼스토리]“죽음의 교화소에서 목숨을 구해준 형”

▲ 베이징에 있는 공관 담을 넘어 진입을 시도하는 탈북자들

식량난이 극심했던 1996년. 그당시 열여섯 소년이던 나는 어머니를 찾아 9번이나 탈북했다.

1996년 식량난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우리 가족은 어머니와 나와 동생뿐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우리 가족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굶기지 않으려고 안 해 본 것이 없으셨다. 그러나 수해와 가뭄으로 낙후된 북한 땅에서 먹고사는 것은 어머니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결국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함경북도 외갓집에 맡겨두고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셨다. 그 이후 어머니와의 연락이 두절됐고, 어린 나이였던 동생과 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슬픈 나날을 보냈다.

친인척들에게 어머니의 주소를 수소문했지만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때 어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시를 생각하면 기억조차 하기 싫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만 갔다. 결국 나는 어린 마음에 무턱대고 국경을 넘었다.

중국 어딘가에는 계실 거란 생각과, 어쩌면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서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그 넓은 중국 땅에서 어머니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다시 함경북도 외갓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처음 국경을 넘을 때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동생과 손을 꼭 잡고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며 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번 국경을 넘고나니 다시 엄마를 찾아 떠나는 마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두만강을 건너갔다가 며칠을 중국 국경도시에서 수소문하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이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던 중 기적같이 일이 일어났다. 인편으로 어머니의 주소가 외갓집으로 전달됐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있는 곳에 가기 위해 9번째 탈북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3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게 됐다. 어머니의 얼굴은 많이 여위어 있었지만 그때의 기쁨은 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한달동안 같이 보낸 시간은 정말 꿈만 같았다. 어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 느꼈던 가족의 소중함, 어머니의 소중함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지옥같던 수용소 생활

그러나 나는 한 달 뒤 북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짐이 될 수 없었으며, 나로 인해 어머니가 중국 공안에 잡힐 수 있다는 걱정에 나는 다시 외갓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북한으로 다시 들어가던 중 보위부 요원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국경을 여러 번 넘는 것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나는 이미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것이었다.

보위부에 체포되면서 나는 지옥 같은 생활을 경험했다. 체포된 후 석 달 동안 구류장에서 심한 문초를 당했다. 구류장에서는 12시간 이상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고통은 웬만한 고문보다 참기 힘들다. 차라리 때리면 맞겠다는 생각을 했다.

견딜 수가 없어 다리라도 펴면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를 들은 간부들은 구둣발로 손을 짓이기던지, 쇠꼬챙이로 손등을 마구 때리곤 했다.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고, 고문 받는 기간 동안 모든 체력을 소진한 나는 피골이 상접해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지옥 같은 생활이 지난 후 나에게 내려진 죄목은 ‘인신매매’였다. 국경을 넘을 때 몇 사람들을 안내해 준 것이 인신매매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죄로 나는 ‘함흥 55호 교화소’로 들어가야만 했는데, 미성년자가 교화소로 가는 일은 조선민주주의공화국 헌법에도 위반되는 일이었다. 억울했지만, 하소연할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

함흥 교화소는 처참한 곳이었다. 교화소 정문에서 “끼기긱” 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제 정말로 죽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마치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교화소에서는 건더기도 없고 한 번 후루룩 마시면 그만인 밀가루 죽을 하루에 두 번 먹고 중노동을 해야 했다.

너무나 노동이 가혹해 하루에도 여러명이 죽어나갔다. 한번은 함흥 지역 성천강에 나가 강바닥을 긁어내는 작업에 투입됐는데, 모래와 흙으로 가득 채운 30~50kg의 지게를 지면서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고통으로만 느껴야 했었다.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목숨을 연명하던 나는 그곳에서 너무나 고마운 은인을 만나게 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됐다. 1년을 버티면 용하다고 하는 죽음의 교화소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게 은혜를 베풀어준 한 형 덕분이다.

내가 교화소에 들어갔을 때 “야, 이리 와봐! 어떻게 들어왔냐”며 날 불러준 한 형이 있었다. 아마 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불쌍히 여겨 불러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때 내 이름을 불러준 형은 우리의 배식을 담당하는 죄수였는데, 죄수 중에서 가장 좋은 직책에 있는 죄수였다. 그 형처럼 배식을 담당하는 죄수들은 죽는 일은 없었다.

나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이던 형은 항상 날 돌봐줬다. 그 형 역시 강냉이를 훔쳐 먹은 죄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의 억울함을 충분히 알아줬다. 식사 시간이면 사람들은 차례로 나가 죽을 받아왔는데 내 번호가 돌아와서 ‘네’라고 대답하면 그 형이 항상 날 알아봐줬다.

제일 어린 내 목소리가 특이했던지, ‘아 , 너구나’ 하면서 내 몫보다 많은 양의 죽을 주곤 했는데,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나는 형을 통해 죽 말고도 떡, 변성 가루(옥수수 가루) 등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면회 온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오면, 형이 그 일부를 나에게 주곤 했는데 그 음식 때문에 살 수가 있었다.

사회에서는 먹지 않았던 변성 가루가 그 당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형의 도움으로 몰래 빼돌려 가루를 먹었는데, 사실 아무 맛도 없는 옥수수 가루였지만 5달 동안 단 한 번도 질리지 않고 먹었다.

만약 그 형이 음식을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굶어 죽었을 것이다. 당시 너무나 갑작스럽게 잡혀온 나는 가족들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는데, 교화소 내에서 가족들이 면회를 오지 않는 사람들 대부분은 영양실조로 일찍 죽어나갔다. 그 형이 없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형은 6개월이 지난 후 출소했다. 형기가 1년이었던 나는 형이 출소한 뒤에 급격히 빈약해져, 구류장에 있던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또 다시 절망이 찾아 드는가 싶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던 모양인지 다행히 난 병으로 3달의 의료 휴가를 얻을 수가 있었다. 집에 돌아간 나는 기력을 회복했고 이후에 가족이 면회를 와서 살 수가 있었다.

1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을 때 동생은 이미 탈북해 어머니와 있었고 2004년에 동생과 어머니는 남한으로 입국했다. 남한에 입국한 어머니의 도움으로 나 또한 2006년에 자유의 땅 남한으로 입국하게 됐다.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긴 나는 지금 이렇게 남한에서 살아가고 있다. 가끔 모든 것이 꿈만 같을 때가 있다. 교화소 이야기를 할 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지금도 생각해면 신기하다. 북한 사회에서도 식량이 없어 사람들이 굶어 죽던 시절, 교화소는 정도가 훨씬 심해 20명씩 죽어나가던 시절, 내가 그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기적같다.

남한에서 같은 교화소 출신 친구를 만난적이 있다.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그 친구를 만났을 때 정말 얼마나 반가웠는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생명의 은인인 그 형도 만나보고 싶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배고파서 어쩔 수 없이 옥수수를 훔칠 수밖에 없었던 그 형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아마도 북한이 열려야만 가능할 것이다. 북한이 하루빨리 열려 그 형을 찾아 고향으로 가고 싶다.

리슬/1981년 함흥 출생, 2006년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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