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NK 발굴] 조총련 최대 권력암투 ‘김병식 사건’ 전말

▲前조총련 부의장 김병식(사망)

재일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에 북한식 독재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람은 김병식 前부의장(99년 사망)이었다. 그는 조총련 의장이었던 한덕수의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었다.

김병식은 한덕수의 심복으로서 反한덕수파를 숙청하는 일에 언제나 앞장섰다. 유난히 권력욕이 강했던 김병식은 제8회 조총련 중앙대회(1967년) 이후, 김정일에 의해 진행된 김일성 우상화 운동에 상식을 초월하는 충성을 발휘했다.

개인 우상화 전문가 김병식

그 결과 1971년 12월 28일에 “김병식 동무를 반대하는 것은 한덕수 의장을 반대하는 것이며, 한덕수 의장을 반대하는 것은 나에게 반대하는 것이다”라는 김일성의 교시까지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를 갈망했던 김병식은 마침내 한덕수 의장을 몰아내려는 ‘반란’까지 도모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조총련 50년 역사에서 최대의 권력 암투로 불리는 ‘김병식 사건’의 출발이다.

이 사건은 조총련 중앙위원회 9기 3차 회의에서 “분파주의에 대한 투쟁이 너무 지나치다”고 지적한 한덕수 의장의 결정에 반발한 김병식이 한덕수 의장의 자택에 도청기를 설치했다가 발각되면서 표면화 됐지만, 당시 조총련 중앙은 대부분 김병식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김병식은 조직 간부들에게 한덕수 의장의 지시를 거부하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당시 히로시마현 본부 위원장인 서만술(현 조총련 의장) 정도만 한덕수 의장의 편에 섰다. (이것을 계기로 서만술은 한덕수에게 발탁됐다).

결국 이 사건은 김일성이 한덕수 의장을 지지하면서 결론이 났다. 이후 김병식은 북한으로 소환되어 <남조선연구소> 소장이라는 한직에 머물렀지만, 후에 자신이 일본에 은닉하고 있던 1억 달러를 김정일에게 바치면서 복권되었다. 김병식은 사회민주당 당수로서 명목상 국가부주석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내부숙청은 독재의 단골메뉴

‘김병식사건’으로 드러난 조총련의 내부숙청과 마녀재판식 공작은 김정일의 독재 통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특히나 당시는 1970년대, 조총련의 전성기라고 불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이 적지 않았다.

김병식의 첫번째 표적은, 1961년 북한당국이 “한덕수에 대한 우상화를 시정하라”는 지시를 담고 있었던 <8월제강>을 통해 한덕수와 김병식을 비판했던 사람들이었다.

김병식은 “한덕수를 지나치게 옹호한다”며 <조선문제연구소> 소장에 취임하려는 자신을 비판했던 사람들과 대중적 지지기반이 넓은 선배 간부들, 자신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후배 간부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따른 조총련의 조직약화 책임을 반대파 간부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조총련의 결성 당시 재일동포들의 75%가 자신의 국적란에 ‘북한’이라고 표기했지만,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1970년에는 46%만이 자신의 국적을 ‘북한’으로 표기했다. 이러한 조직 약화의 책임을 ‘김일성 절대화를 거부한 반대파 때문’으로 몰아세웠다.

결국 친독재 세력만 남아

김병식이 자신의 세력확대 거점으로 이용한 것은 중앙의 조직, 선전부, <조선문제 연구소>등 이었다. 조총련 청년동맹의 ‘열성자 조직’들과 재일 조선대학교 정치 경제학부 등의 인맥을 자신의 친위대로 이용했다. 또한 간사이(關西)의 금융업자와 토호쿠(東北)의 상공인들, 북한으로 귀국한 재일상공인들이 기부금을 낸 회사들을 자신의 휘하에 놓고 자금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김병식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조직을 만들어 이를 바탕으로 조통련 내부에서 입지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향을 키워갔다. 특히 ‘학습조’를 최대한 이용했다.

김병식은 ‘학습조’를 통해서 반대파라고 생각되는 간부들을 ‘검열대상자’라고 낙인 찍어 굴복할 때까지 ‘검열과 총화’를 통해 괴롭혔는데, 그것은 거의 ‘고문’ 수준이었다. ‘학습조’를 통한 검열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간부들 대해서는 ‘올빼미부대’라고 불렸던 김병식 친위대를 동원해 폭력과 테러를 일삼았다. 그 결과 ‘의문사사건’이나 ‘자살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동포들 사이에서 반대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마녀재판’을 노골적으로 밀어 부쳤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비롯한 모든 선전수단을 동원하여 ‘반당분자’ ‘한국정보기관의 첩자’라는 식으로 공격했다.

동포사회 조총련 외면

당시나 지금이나 조총련의 비민주적 체질과 수법은 변함이 없다. 다만 한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더 이상 동포사회가 조총련 중앙의 ‘공작정치’를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직도 조총련은 자신의 문제점을 ‘내부의 분파주의’나 ‘적들의 음모’ 때문이라고 둘러대고 있다. 따라서 조총련 ‘내부숙청’이나 ‘마녀재판’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조총련에는 무능하고 권력에 아첨만 하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현재 조총련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前 간부, 민족학교의 교원, 조총련계 신용조합의 직원, 사업체 직원 등의 약 4천명과 1만명 전후의 학생, 거기에 관련된 수 만 명 뿐이다.

조총련은 일정한 고용인원과 북한에 있는 인질 때문에 폭발적 파멸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그 존재가 끝날 것으로 보인다.

박두진 본지고문(日 통일일보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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