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진전없는 북일 관계, 그 이유는?”

▶전날 북한 주민들이 청취한 대북 라디오 방송 중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자유조선방송/5월 23일>

집중분석-진전없는 북일 관계, 그 이유는?

화제가 되는 뉴스를 살펴보는 집중분석 시간입니다. 지난 22일 일본 정부가 제2차 ‘조-일 정상회담 10주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했는데요, 당시 정상회담에서 국교수립문제까지 논의했는데 이후 10년간 조일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김민수 기자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진행: 2002년과 2004년 조일 정상회담이 두 차례 열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조일 관계가 나쁘진 않았죠?

김: 네. 2002년 9월 17일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서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이때 두 정상은 ‘평양선언’에 합의했는데요, 이 선언이 나오면서 조일 관계는 급진전했고 그동안 현안에 대한 두 나라의 의견 차이가 커서 번번이 무산됐던 수교 교섭도 곧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조·일 간 국교 정상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진행: 평양선언에 어떤 내용이 담겼습니까?

김: 총 다섯 가지 사안이 담겼는데요, 국교 정상화의 조속 실현을 위해 2000년에 중단했던 수교회담을 재개하기로 했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 사과와 보상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을 약속했습니다. 또 고이즈미와 김정일은 국제법 준수와 상호안전 불위협 합의를 했고 김정일은 일본인 납치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핵·미사일 등 안전보장 문제에 관한 관련국 대화를 추진하고 해결을 도모한다는 내용도 평양 선언에 담겼습니다.

진행: 10년 전에 열린 제2차 조·일 정상회담에서 평양선언을 재확인한 것을 보면 두 나라 정상이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지금까지 진전된 게 없는 겁니까?

김: 일본인 납치 문제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많은 일본인이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행방불명된 사건을 조사하다가 북한 공작원 등의 증언을 통해 북한 당국에 의해 납치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에 따라 1991년 이후 일본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 당국에 납치 문제를 제기했지만 북한은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 왔습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2002년 제1차 조·일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에게 납치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사죄했으며 재발 방지까지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일본 내 여론이 악화하면서 일본 정부도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하기 힘든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진행: 김정일이 수십 년간 인정하지 않았던 일본인 납치 사실을 왜 인정한 건가요?

김: 그 배경은 알기 어렵지만 그만큼 김정일이 조일 관계 개선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로 경제적 이익 때문인데요, 앞서 평양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과 일본과의 수교회담이 잘 돼서 국교가 정상화되면 일본은 식민지 지배 사과와 보상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을 약속했습니다. 당시 북한 통일전선부 일꾼이었던 장철현 씨는 조일 정상회담 직후 통일전선부 간부용으로 배포된 강연 자료에서 ‘납치를 인정하면 일본이 북한에 100억 달러를 지불키로 했다’고 쓰여 있었다고 폭로한 바 있습니다. 막대한 돈을 노리고 고이즈미 총리가 바라던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했던 겁니다. 다만 김정일은 자신은 몰랐고 특수기관 일부가 망동주의, 영웅주의로 치닫고 이러저러한 일을 해왔다면서 일본인 납치 책임자를 처벌한 자신은 역할을 다했다는 식의 태를 보였습니다.

진행: 그럼 일본 사람을 왜 납치한 겁니까?

김: 주된 목적은 한국 공작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본 정부가 북한으로 납치됐다고 공식 인정한 사람은 17명입니다. 이 중에 일본이름 다구치 야에코, 조선 이름 ‘리은혜’는 1978년 22살 때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를 당했는데요, 리은혜는 1987년 한국 여객기를 폭탄 테러한 김현의 일본어 선생이었었습니다. 당시 김현희는 일본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 리은혜와 같이 살면서 말은 물론, 일본 문화와 여자들의 화장법까지 배웠습니다. 이건 한국에 체포된 북한 공작원 김현희와 북한에 납치됐다가 일본으로 돌아온 납북자 치무라 후키에의 증언과 일치합니다. 1977년 13살에 납치당한 요코타 메구미도 북한 공작원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진행: 13살 소녀까지 납치했다는 건데요. 일본 국민들이 그냥 묵과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김: 그렇지요. 아마 김정일은 물론 고이즈미 총리도 일본 내 여론이 납치 문제로 그렇게 악화하리라곤 예상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김정일의 경우 납치 같은 건 큰일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히 사과하고 협조하면 넘어갈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요청하지 않았던 소가 히토미 씨까지 포함해 13명의 일본인을 납치했고 이 중 8명은 죽고 5명은 생존했다고 밝히면서 사과를 했습니다. 또 1차 정상회담이 열린 다음 달인 2002년 10월에 생존자 5명이 일본을 일시 방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24년 만에 일본이 납치 피해자들이 고향을 찾은 모습을 본 일본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5명의 피해자가 자기 의사에 반해 납치됐다며 일본에 남도록 했습니다. 이후 일본인 납치 피해자에 대한 진상규명이 조·일 간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습니다.

진행: 지금까지 조일 관계가 개선되지 못한 이유는 결국 일본인 납치 문제가 명쾌하게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야겠네요.

김: 그렇습니다. 김정일은 2004년 5월 2차 조·일 정상회담에서 2002년에 일본으로 귀국한 납치 피해자 가족 5명을 고이즈미 총리에게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사망했다고 밝힌 8명 중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는데 이 유골에서 다른 사람의 유전자가 검출돼 가짜로 판명됐습니다. 이 외에도 사망했다거나 신원 확인이 안 된다는 납북자들에 대한 정보나 물증에 의혹이 많아서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김정일은 자신이 통 크게 양보했는데 일본이 관계를 악화시킨다면서 반발했고, 이후 북한 당국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이 이어지면서 일본이 독자적 대북제재를 하는 등 관계가 악화됐습니다.

진해: 네.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김민수 기자 감사합니다. 최근 일본인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조일 당국 간 회담이 열렸는데요. 김정은 정권이 달라진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 진전된 것이 없습니다. 북한 당국, 이제라도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