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선의 일기⑦] “오빠의 방황 ”

고등중학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있어 6년제의 학교를 말함)에 진학한 후부터 생활이 더 힘들어졌습니다. 먹지 못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숙모님은 나를 소나 말과 같이 부려먹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저것 마구 일을 시켜 쉴 틈이 없었습니다. 집에 있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들판에서 풀을 뜯으며 시간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숙모님이 시키는 일들을 하느라 시간이 없어 학교에 못 가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제는 성적 같은 것은 신경쓸 수도 없었습니다. 배가 고파 쓰러지기 직전의 나를 그래도 버텨주고 있는 것은 장래의 꿈뿐이었습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서 그 꿈에 다가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주 학교를 빠지고 수업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날들이 지속되자 나중에는 시간이 있어도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학교 가기가 싫어진 것입니다.

1996년 9월에 고등중학교 2학년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진학식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희망을 잃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없어진다면 살아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삶을 떠받쳐줄 수 있는 희망만 있다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절망밖에 없다면 무엇 때문에 굶주림을 참으면서까지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빠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니 오빠는 나보다도 세상일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절망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이 없는 나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오빠는 점점 더 나빠져서 여러 가지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여기 저기 친구들과 방황하면서 나쁜 짓만 해서 숙부님한테 욕을 먹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학교에 나가게 되면 수령님(당시 북조선의 원수 김일성을 말함)의 초상화에 손상을 입혀 학교 전체가 들썩거리도록 만든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오빠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른스럽지 못한 오빠의 행동 때문에 나까지 숙부님 눈치가 보여 어깨가 좁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숙부님을 볼 때마다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The DailyNK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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