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김정운 후계과정에서 되돌아본 ‘8월 종파사건’-上

2008년 말 김정일의 와병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외에서 포스트 김정일 시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후계자 김정운의 조기 부상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 내에서도 후계 승계를 서두르고 있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

후계 과정에 대해 여러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김정일이 사망한다 해도 단기간에 혁명적 상황이 조성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김정운이 권력체계를 안정화 시켜 장기집권에 성공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앞날을 내다보는 데 있어 과거 북한의 권력 투쟁 역사를 참조해 볼 필요도 있다.

물론 그 당시와 지금은 여러 측면에서 상황이 달라졌지만 북한 내에서 권력 갈등이나 궁정 쿠데타를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와 유사했던 정치적 상황을 돌이켜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돌아보고자 한다.

‘8월 종파사건’ 계기로 김일성 유일지배체제 확립

김일성 중심의 유일지배체제가 당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확립된 것은 1961년 3월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기 제3차 전원회의였다. 이전에 겉으로는 파벌에 관계 없이 연합구조로 이뤄졌던 북한 권력 행태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종점으로 김일성과 그 지지자들의 단독 구조로 변모해 갔다.

이 8월 종파 사건 이후 김일성에 대해 저항할 만한 세력은 정치 중앙무대에서 대부분 사라졌고 기층에서도 대중적으로 반혁명분자 척결 작업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됐다.

‘8월 종파사건’은 1956년 8월에 연안파와 일부 소련파의 주도로 권력에서 소외됐던 세력들이 김일성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모의한 북한 최대의 권력 투쟁 사건이었다.

6·25전쟁 후 북한의 권력구조는 전쟁 마감시기 남로당(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한 출신 간부)이 숙청된 이후로 중국과 소련의 지지를 업은 연안파(중국 지도부와 가까운 세력)와 소련파(소련에 줄을 잇고 있던 세력) 세력이 김일성에 대항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소련 스탈린 사망 이후 국제공산주의 운동세력 내에서는 개인숭배의 오류를 범하지 말 데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고, 김일성도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개인숭배란 맑스-레닌주의 사상과 또한 레닌의 집체적 지도원칙에 배치되는 것으로서 규탄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개인 숭배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고 김일성 세력도 이러한 전반적 분위기에 밀려 김일성 숭배 분위기 조성에 주춤하고 있었다. 여기에 전후 복구를 둘러싸고 중공업 우선 노선과 경공업과농업의 병행 발전 노선 사이의 갈등의 골도 커지고 있었다.

중공업 우선 노선과 경공업·농업 병행발전 노선 대립

항일투쟁시기부터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연안파는 김일성의 중공업 선차 발전 노선이 현재 북한이 처한 내부 조건과 환경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하고 김일성으로의 권력 집중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들의 주장은 인민생활을 먼저 발전시켜 전쟁으로 인해 빈손으로 나앉은 인민들의 생활을 최대한 빨리 안정시켜 주자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경제정책 노선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노선 비판의 선을 넘어 점차 권력 탈취를 위한 시도로 발전했다. 여기에 소련파가 가세해 북한 권력층은 본격적인 권력투쟁의 회오리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했다.

1956년 6월 1일∼7월 19일까지 김일성은 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외국 원조를 구하기 위해 구소련과 동구라파 사회주의 나라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 때를 기회라고 생각한 연안파와 소련파는 구체적으로 김일성을 권좌에서 밀어낼 계획을 세웠다.

당시 부수상 겸 재무상 이었던 최창익을 중심으로 북조선 직업동맹(현재 직업총동맹이라 불리움)위원장 서휘, 상업상 윤공흠, 황해남도 당위원장 고봉기 등 연안파와 당중앙위원회 비서였던 박창옥을 중심으로 건설상 김승화, 부수상 겸 국가건설위원장 박의완 등 소련파가 손을 잡았다.

여기에 건제공업국장이었던 리필규와 남로당 출신인 석탄공업상 류축운, 수매량정상 오기섭 등 국내파까지 연결되어 광범위한 반 김일성 연합전선이 조직되었다.

반 김일성 세력은 두 개의 그룹 즉 연안파와 소련파가 각각의 형태로 행동을 준비했다. 연안파를 중심으로는 당시 평양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제4군단사령관과 내무부상 리필규를 중심으로 권력 교체의 수단을 당내 비판과 군사 쿠테타라는 두가지 방법을 계획했다.

다른 하나의 그룹은 소련파를 중심으로 연안파보다 온건한 형태인 당내비판과 소련의 협조에 의지하려는 방식을 계획하고 있었다.

권력 전복 시도 사전에 들통나 제동

반 김일성 세력들은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당내 비판을 통해, 김일성을 축출할 계획을 세웠다. 리필규는 평양 근교에 주둔중인 제4군단과 시내 방공포대, 공병부대 등과 연합해 무력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권력 전복 시도는 실행되기도 전에 김일성과 그 지지 세력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김일성은 해외에서 정권 전복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 수상 대리였던 최용건의 보고를 받았다. 급히 북한으로 돌아와 8월 2일에 진행하기로 되었던 전원회의를 미뤄가며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착실히 준비해갔다.

드디어 8월 30일 김일성은 당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의 본 안건은 두 가지로 하나는 김일성을 위시로 한 정부 대표단의 외국방문에 대한 보고와 인민보건사업의 개선 강화를 위한 문제를 토론하기로 돼 있었다. 회의가 시작돼 김일성의 보고가 끝나자 윤공흠이 먼저 일어나 의제와 관계없는 중공업 우선노선과 김일성의 개인숭배 및 당내에서 독재행위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일성 지지파들이 윤공흠의 발언을 중지시켰으나 서휘, 최창익 등이 일어나 윤공흠의 입장을 지지하는 토론을 진행했다. 그러나 당 조직부장 김금철과 당 선전선동부 김도만 부부장 등 김일성 지지세력들이 일어나 이들의 행위를 종파로 규정해 비판했다.

술렁거리던 회의장 분위기가 체제 전복세력에게 불리해지자 연안파와 손잡기로 했던 소련파는 침묵을 지켰다. 전원회의에서 종파 행위로 몰린 연안파는 결국 반당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숙청의 대상이 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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