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지원국 해제] 북미관계 오늘과 8년전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임기말 급진전 양상을 보이는 북미관계가 클린턴 행정부 말기의 전례와 달리 미국의 새 행정부 출범 후에도 계속 진전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때처럼 급제동이 걸리며 후퇴한 역사를 되풀이할 것인가 물음에 일단은 긍정적인 전망이 우세하다.

이러한 전망을 낳는 8년전과 차이점은 무엇보다 2000년 북미관계는 ‘말 대 말’의 수준에 머물렀다면 현재 양자 관계는 ‘행동 대 행동’으로 진행되고 있는 데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과 미국 사이에선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교차방문을 통해 상호 적대의사 불보유와 경제협력, 미사일 문제의 해결, 국제적 반테러 노력 지지 등의 내용이 담긴 ‘북.미 공동코뮈니케’가 만들어지졌으나, 가시적인 성과물로 이어지진 못했다.

이에 비해 현재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의 가동 기록을 지난달 미국에 넘겨준 데 이어 26일 북핵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핵신고를 하고, 27일엔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키로 함으로써 불능화를 마무리하고 비핵화 3단계인 핵폐기로 넘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상응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고 대적성국 교역법의 적용도 중단키로 하고 의회에 통보 절차를 밟음으로써 북미관계의 제도화 수준을 끌어올렸다.

1994년 제네바 합의의 ‘무역 및 투자제한 완화’ 조항에 따라 클린턴 행정부도 북한과의 교역제한 완화 등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북한을 법.제도적으로 구속하는 테러지원국 지정의 해제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었다.

또 하나의 주요한 차이점은 2000년 북미관계는 철저히 북한과 미국간 양자틀 속에서 논의됐었다면 이번 북미관계는 6자회담이라는 다자틀과 연계돼 있다는 것이다.

2000년 북미관계는 고위급 인사의 상호방문과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의 방북 추진 등 급진전 양상을 보이다가 북한에 강경한 부시 행정부의 등장 후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은 안된다는 부시 행정부의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으로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양자간 합의가 정권교체를 계기로 이행동력을 상실한 대표적인 사례인 셈이다.

이에 비해 오늘의 북미관계는 6자회담이라는 다자틀과 직결된 가운데 구축됨으로써 다자의 합의로 양자관계의 불안정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전망이 우세하다.

6자회담에는 북한과 미국 이외에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도 참여한 만큼 이 속에서 만들어진 합의를 북한이나 미국 모두 쉽게 번복하기 어려울 것이며, 그에 따라 미국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현 합의는 이행동력을 유지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26일 “6자회담이라는 다자채널의 등장은 북미 양자관계의 성격과 환경을 2000년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이끌고 있다”며 “북미 모두 가시적인 조치로 관계를 이끌고 있는 만큼 현재의 국면이 쉽게 뒤집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2008년의 북미관계를 2000년의 그것처럼 뒷걸음질 치게 할 불안요소들도 있다.

2000년 북미관계는 그해 6월 열린 남북정상회담의 결과에 영향받아 미국 대선을 한달여 앞둔 10월부터 본격화되는 바람에 시간에 쫓겼고, 이는 미국의 대선까지 5개월 밖에 남지 않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특히 8년전 부시 대통령의 등장으로 북미관계가 ‘온탕’에서 ‘냉탕’으로 급변한 것처럼, 이번에도 미국의 대선 결과가 새 대통령의 성향이나 새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 시간 등의 이유로 북미 양자관계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2000년에는 미사일, 현재는 핵개발이라는 북한으로선 포기하기 힘든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이 협상 대상이라는 점도 유사하다.

이 협상카드로 자신들의 실리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연전술이나 ‘살라미 전술’, ‘벼랑끝 전술’ 등을 구사하며 협상 상대의 애를 먹이는 북한의 협상 전략은 상대측 내부여론을 악화시키기 마련이고, 그 결과 협상판 자체가 흔들리는 경우도 많았다.

2000년 북미간 미사일 협상에서도 판돈을 키우려는 북한의 지연전술만 아니었다면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의 방북이 성사돼 북미 양자관계에 공고한 틀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북한이 당시 ‘실기’했다는 것이다.

한 대북전문가는 “미국의 정권교체기라는 점 등 2000년과 유사한 대목이 있어 관계 악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부시 행정부의 남은 시간, 북미 양측이 연락사무소와 같은 외교적 채널을 수립해 관계의 제도화 수준을 높인다면 양자관계의 안정성을 제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이루기 위해 북한에 제기하는 핵, 미사일, 생화학무기, 재래식 무기, 인권 등 5대문제가운데 8년전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인권문제가 최근 수년간 국제사회의 이슈로 떠오른 점도 북미관계 진전의 지속에 제약을 가할 수 있다.

미국에선 북한의 인권개선이 대북관계 정상화의 전제조건이 됐지만 북한 정권에 인권은 체제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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