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기자] 내가 북에서 직접 본 공개총살

▲ 공개총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소학교 어린이

북한에서 자란 나는 공개처형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

나는 북한에서 5번의 공개총살형과 두 번의 공개교수형을 직접 보았다. 지금도 유치원 시절에 본 공개총살을 바로 눈앞에 전개되는 것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1979년 봄 어느날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ㅇㅇ시 공설운동장에 설치된 공개재판 장소에 갔다. 운동장에는 이미 공장, 기업소에서 동원된 3백명의 노동자들이 가족과 함께 있었다. 키가 작은 우리 또래의 유치원생들은 맨 앞줄에 앉았다.

한국으로 탈출하려다 공개총살형

곧 공개재판이 시작됐다. 임시로 만든 재판석에는 중앙검찰소와 중앙재판소의 위임을 받은 검사와 판사, 그리고 인민 참심원(배심원과 비슷-편집자)들이 앉았다.

사형수인 최모씨는 재판부와 마주하고 있어 뒷모습만 보였다. 검사의 심문이 시작됐다.

최씨는 작은 기관선의 선장이었다. 1978년 겨울 그는 기관장과 함께 배를 이용하여 한국으로 귀순하기로 약속하고 배가 출항하자 공해상으로 나갔다. 당시 배에는 6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명태잡이 나온 배가 그물은 치지 않고 계속 동남쪽으로 항해하자 선원 중 일부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눈치챈 최씨는 기관장과 함께 선원들을 한명씩 만나 한국으로 가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갑판장과 무전수, 취사장이 완강히 반대하자 두 사람은 그들을 묶어 선실에 가두었다.

그런데 얼마 후 묶었던 그들이 결박을 풀고 선장과 기관장을 상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서로 결사적으로 흉기까지 들고 배안에서 혈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 기관장과 갑판장, 취사장이 죽고 선장 최씨와 무전수는 부상을 입었다. 이때 무전수가 ㅇㅇ수산사업소에 위험신호를 보냈다. 위험신호를 받은 수산사업소는 해군에 연락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연락을 받은 해군에서는 경비정을 출동시켜 배를 찾았다. 그 시각, 배는 원산 앞바다 공해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해군경비정을 본 선장 최씨는 무전수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죽지 못하고 해군에 체포되여 치료받고 ㅇㅇ시 보안서(경찰)로 넘겨져 예심을 받았다.

‘사람을 죽이다니…’ 검사의 말을 들은 나는 무서워 떨기 시작했다. 검사의 심문이 끝나자 판사가 그에게 인정 여부를 물었다. 그는 모두 인정한다고 답변했다.

피가 튀는 모습이 눈앞에

판사는 남조선으로 도주를 시도하고 살인을 저지른 국가반역자 최씨를 사형에 처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판결이 끝나자 보안성 계호원들이 그를 끌고 재판석 뒤에 설치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10분 정도 지나 그를 데리고 나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보았다.

눈과 입을 흰천으로 묶고 있어 얼굴을 알 수 없었다. 천막 안에서 계호원들은 이미 그를 초죽음 만들어 입에 자갈을 물리고 세워져 있던 나무기둥에 가슴, 배, 다리 순으로 묶었다. 대기하고 있던 사격수 4명이 군관의 명령에 따라 자동보총(소총)을 들고 최씨 앞에 섰다.

‘사격준비’, ‘쏴, 쏴 ,쏴’ 명령과 함께 총성이 울리고 사방에 피가 튀었다. 그는 머리를 떨구며 쓰러졌다. 그의 시체는 가마니에 싸여 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개처형 있을 것

나는 집으로 오면서 아무것도 보기 싫어 땅만 보고 걸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공포감에 시달렸다. 눈만 감으면 그의 피 튀는 모습과 총소리가 들려 이불을 뒤집어 썼다. 나는 그렇게 몇 달을 시달렸다.

그후 나는 되도록 공개처형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동원된 경우도 멀리서 눈과 귀를 막았다.

90년대 중반 극심한 식량난 때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도 많이 목격했지만 7살에 본 공개총살처럼 정신적 충격을 준 사건은 없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북한에서는 공개처형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또 그 현장에 동원된 유치원 꼬마들의 까만 눈동자에 피가 튀는 장면이 찍혀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수십년 동안 변치 않는 북한정권의 모습이다.

강재혁 기자(함흥출신, 2004년 입국) kjh@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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