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청년 감동수기] 자살기도…깨어나니 차디찬 새벽 빗방울

나는 함경남도 청진시에서 당 간부로 계신 아버지와 따뜻하고 정이 많은 어머니의 1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없으면 집안의 대가 끊어지는 사정으로 나는 더 없이 유복한 생활 속에서 성장했고 탄탄한 출신성분과 배경, 그리고 주어진 권력의 안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자랐다.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는 우리 집은 소위 ‘기득권층’이라고 불렸고 나 역시 학교 전 기간을 학생간부로 지낼 만큼 집안 덕을 많이 보았다.

어려서부터 나는 수재라는 말을 들을 만큼 머리가 뛰어났던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받은 표창장은 50개를 넘을 정도였고 공부 잘한다는 학생들을 뽑아 진행한다는 전국모범학생 행사에도 매년 참가했다.

17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북한의 ‘스카이 대학’이라 불리던 김책공업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어떤 비리를 저질렀다는 당의 추궁과 감금은 나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가 탈출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기위한 2년간, 그토록 한국행을 바라던 어머니와 누나는 북한 보위부에 의해 강제 북송되었고 그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나는 2003년 홀로 한국에 입국했다. 서울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나의 끝없는 방황과 시련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글썽해진다.

한 달이 지나도 아무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서울의 먼지 가득한 임대아파트에 짐을 풀고 병든 몸을 안고 병마에 몸부림 치며 혈혈단신이라는 설움을 알았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과 탈북자라고 바라보는 사회적인 경계시선 역시 유복하게 자라왔던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시련으로 다가왔다.

부모, 형제 두고와 죄책감에 좌절

한국에 와서 1년 동안은 술과 라면으로 살았던 것 같다. 북한에서 올 때는 몸무게가 85킬로였지만 몇 달 사이에 30키로 이상이 축났으며 점점 술과 우울증에 중독이 되어 갔다. 눈을 감으면 악몽이, 눈을 뜨면 현실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점점 나의 성격마저 변해갔다.

북한에서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어서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루며 살았던 나는 한국에 와서부터 점차 사람을 극도로 꺼려하는 대인기피증 현상을 보였고, 술만 먹으면 공격성을 표출하는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되어 있었다.

술을 먹고 싸워서 경찰서에 구류장에 가는 날이 많았고 주위에 탈북자들조차 나에게 실망한 시선을 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북한의 권력층에서 졸지에 한국사회의 하류층으로 전락했다는 비교의식이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사회에 적응 못했던 나는 모든 것을 끝장내고자 여러 번의 자살을 시도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술을 먹은 채 차를 몰고 내부 순환로를 질주하며 차사고로 죽기로 했지만 그런 ‘행운’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한번은 아파트에서 투신으로 죽으려고 결심을 한 적이 있었다. 소주 6병을 사들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한 병, 두병 소주병을 비우면서 작별을 고할 때 나를 깨운 것은 새벽의 차디찬 빗방울이었다.

나도 모르게 술에 취해 옥상에서 잠들었고 그러한 나를 빗방울이 깨웠던 것이다. 나는 그때서야 나에게 자살할 용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한 나를 비겁하게 생각하면서 나약한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자신을 더욱 학대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뜻밖의 천사가 찾아왔다. 어느 교수님의 소개로 찾아왔다는 서울의 모 여자대학교의 여대생이었다. 북한 청소년에 대한 연구조사를 진행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녀와 며칠을 만나면서 나는 그녀에게서 북송되어 북한에 들어가 있는 친 누나의 정을 느꼈고 그녀를 통해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녀에게 털어놓는 말이 많아졌고 그녀의 도움으로 놀랍게도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의 상처가 하나둘씩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북한에서 공부를 하다 왔다는 나의 말을 듣고 나에게 학업을 권유했다.

그러면서 과외 선생을 자칭해 나섰다. 그로부터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대입준비를 시작했고 나보다 연상인 ‘과외선생‘과 사랑을 하게 되었다. 때로는 어머니가 되어주고 때로는 엄격한 누나로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으로 나를 보듬어 주는 그녀의 사랑과 배려로 나는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내 꿈과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자원봉사자의 일을 하는 그녀를 따라 나는 고아원이며 ‘달동네’ 들을 다녀보면서 이 사회에 나보다 힘들고 아프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과거의 행동들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사랑’ 깨우쳐 준 나만의 천사

대입준비를 하면서 나는 짬만 되면 그녀와 복지기관을 찾아다녔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밝은 면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한줄기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와의 따뜻한 사랑은 나를 새 인생을 찾은 새 사람으로 만들었고 또 바라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각종 자격증을 따냈으며 주말회사에 취직도 했다.

하지만 내가 기사회생되는 모습에 질투라도 하는 듯 갑작스러운 불행이 찾아 왔다. 그녀의 부모들이 자기의 딸과 교제하는 내가 ‘탈북자’라는 사실을 알고 우리들의 만남을 반대해 나섰던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부모들이 권력과 부를 이룬 대한민국의 성공한 집안이며 감히 내가 다가갈 수 없는 높은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유학을 떠나는 것으로서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끝나게 되었다.

또다시 찾아든 공허감, 허탈감, 그리고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출신과 신분에 대한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올랐고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움 아픔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가 떠나고 방학이 되자 나는 그녀와 반대 방향인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곳곳에 배여 있는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북한이 마주보이는 두만강 강변에 서서 차라리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체류는 내 인생의 또 다른 반전을 불러왔다. 공안의 추격과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떠도는 수많은 탈북자들을 보면서, 한줌의 식량과 몇 푼의 돈에 팔려가는 북한 여성들을 보면서 나는 나의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분의 차별을 생각했던 자신과 다니고 있는 좋은 대학과 가능성 있는 여건(환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헛살았던 나 자신에 대하여 마음속의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잊을 수 없는 일이 아직도 아픔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제 15살이라는 어린 북한 소녀가 한족(중국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채 나에게 한국행을 도와 달라고 글썽이던 절망적 눈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북한군 국경 수비대로 있다가 탈출했다는 군인출신의 탈북자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하여 지금도 떳떳하지 못하다. 방학이 끝나자 나는 한국에 왔고 오늘까지 나 자신을 알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하여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하루 5시간 남짓 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공부를 병행하면서도 그래도 부족한 것 같아서 죄스럽다. 잡혀가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을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고향에 대한 연민! 이러한 생각들이 나를 술에서 떠나게 만들었고 떠나간 여자 친구한테 미움이 아닌 고마움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이제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그 어떤 사명감이 나를 붙들고 있다. 시련을 이겨낸 나의 마음속 저변에는 고향사람과 함께 통일된 한반도에 대한 사랑이 슬며시 자리 잡고 있으며 이미 많은 것을 되찾고 있다.

탈북청소년의 ‘수호천사’ 되고 싶다

대인관계도 회복하고 있고 앞날에 대한 자신심도 커져가고 있다. 술-우울증-자살, 나의 이 모든 절망적 유혹을 이겨낸 것은 환경의 열악함이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의무와 그 의무를 지키려는 건강한 심리와 사고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죄인의식으로, 나약한 마음으로 분단과 시대의 기형아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를 여기까지 등 떠밀어준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감사한다.

그녀를 통하여 나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 그리고 사회,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동시에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한 아직 외롭고 힘들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지난 3년간 고향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면서 나약한 마음을 다잡곤 한다.

그 노래 속에 그동안의 아픈 시간들이 함축되어 있고 힘들 때면 그 나날들을 돌이켜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곤 한다.
지금 나는 무연고 탈북청소년 2명을 데리고 살고 있다. 의지할 곳도, 의탁할 곳도 없는 그들을 우리 집에 데리고 오면서 어린마음들에 쌓여진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다.

문화적인 이질감, 그리고 과거의 충격, 또한 어린 눈으로 보는 사회주의가 아닌 낮선 자본주의,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 사회에서 그들이 빨리 동화되고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생각으로 기꺼이 나는 그들의 형이 되었다.

한국의 청소년들, 사춘기 청소년들과 방황기의 젊은이들 보다 몇 배나 되는 갈등과 혼란을 겪어있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당황하곤 한다. 하지만 과거의 내 경험이 동생들의 상담자로 나를 이끌어 내고 있다.

지금도 추석이나 설날이면 사진도 없이 자기 부모님 이름만 적힌 제사상에 절을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들과 함께 나도 울면서 이렇게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말한다. “동생들아~ 지금은 방황하고 갈등하며 혼란스럽겠지만 너희들이 앞으로 비바람과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난 억세고 푸른 소나무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형은 알고 있다.”

나는 항상 그들에게 혼란과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문하곤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모든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와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이미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강상원(가명)/ 2003년 입국, 대학생

※ 탈북자 방송 <자유북한방송>의 양해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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