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주부의 송년추억] 구리 밀수해서 설 명절 준비

▲ 북한가정의 윳놀이 모습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이다.

회사마다 종무식이 끝나면 회식자리가 마련되고, 교회와 선교단체들도 송년행사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을 보내온다. 나도 탈북자들을 위해 동사무소에서 마련한 송년잔치에 다녀왔다.

남한에서 맞는 첫 설 명절은 내게 각별한 느낌을 준다. 작년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설 명절 때문에 걱정했던 생각을 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아무리 남한이 발전되었다 해도 이렇게 천지 차이인지 상상하지 못했다. 남한의 슈퍼마켓과 대형 할인점마다 물건이 넘쳐나 여기 사람들은 명절 음식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 설 음식도 집에서 잘 해먹지 않고, 설맞이 행사장에 나가 외식을 한다.

설 명절 준비는 아내가 짊어져

북한도 설이 오면 명절 준비를 한다. 자고로 ‘만두국에 떡국을 끓여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풍습이 내려져 오고 있다. 아이들에게서 세배를 받고 새해 덕담을 나누고, 가족끼리, 동네사람들끼리 모여 윷놀이와 장기, 주패놀이도 한다.

설날만큼은 끊겼던 전기도 공급된다. 김일성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아침 9시부터 방송하는 신년사를 청취하고 새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은 TV 신년사에 한번도 출연하지 않고 노동신문에 신년사설만 내보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설음식 장만이다. 설 준비는 아내들의 몫이다. 집집마다 설날 먹거리를 걱정하는 한숨 소리 또한 높다. 국가에서 주던 술 한 병과 과자 한 봉지가 끊긴 지 꽤 오래됐다. 공장이 가동을 멈추자 배급표를 타오던 남편은 할 일이 없어 담배만 연신 피워댄다.

우리 집안의 모든 짐 또한 일체 내가 짊어져야 했다. 밀수라도 해야 명절음식을 장만할 수 있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서 지방 사람들이 밀수품을 가지고 신의주로 들어온다. 나도 설명절 준비를 위해 조개잡이 배를 타고 나가 동(구리)을 중국 사람들에게 판 적이 있다.

구리 밀수, 설명 절 준비

연말을 앞두고 지방에서 젊은 부부가 동선을 탄띠처럼 허리에 차고 신의주에 들어왔다. 가뜩이나 찬 날씨에 동을 차고 들어오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동기나, 변압기에 들어가는 동선은 보안원에게 단속되면 최고 사형까지 당하는 위험한 물건이다.

그들이 신의주 역전 개찰구를 빠져나올 때 증명서 검열을 하는 역전 보안원에게 단속될 뻔했다고 한다. 개찰구마다 차표를 걷는 안내원과 보안원들이 밀수품을 단속하기 위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한 북한사람들의 생리적 본능은 이처럼 대단하다.

밀수는 대체로 조개잡이 행렬에 끼어 바다에 나가 한다. 실제로 조개가 많기로 유명한 철산 앞바다에도 조개가 거의 없다. 몇 십년 동안 주민들이 오로지 바다갯벌만 뒤지는 바람에 조개 씨가 말라버렸다.

바다로 향하던 배가 압록강 하구에 도달하자, 국경경비대 순찰정이 다가온다. 갑판에 군인들이 오르기 전에 우리는 바줄에 동을 매달아 바닷물에 던진다. 밧줄에 동이 매달려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한 그들은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채 헛물만 켜고 돌아갔다.

바다에 나가면 중국인들은 저마다 ‘퉁(동)’을 찾는다. 중국인들은 동 1킬로그램에 밀가루 5kg이나, 중국담배 1보루씩 준다. 담배는 국경초소에서 단속하므로, 대체로 밀가루나 쌀로 바꾼다. 이렇게 조개잡이 나갔던 사람들은 밀가루를 한 포대씩 메고 집으로 돌어온다.

그걸 장마당에 들고 나가 팔아 고기와 쌀, 부식물을 사가지고 명절 준비를 한다. 이렇듯 북한에서 명절은 아내들에게 있어 고통 그 자체다.

“새해에는 돈 많이 벌자”

설날 아침이 되면 남편과 아이들이 식탁에 마주앉는다. 남편은 “못난 나를 만나 당신이 고생한다”며 수저를 들지 못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새해에는 잘 살아야 한다”고 격려했다.

지난 날에는 아이들에게 “장군님의 배려에 충성해야 한다”고 말해왔지만, 요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병신취급 당한다. 남편도 나에게 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며 “내년엔 내가 돈을 많이 벌어 당신을 쉬게 해줄게”라고 힘을 준다. 아무리 구실 못하는 남편이라도 그때 그 말에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던지.

그 남편 말 한마디가 얼었던 내 가슴을 훈훈히 녹여준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그 희망이 없는 땅에서 우리 가정이 뭘 바라보고 살았는지 기적일 뿐이다.

한명숙/ 2006년 탈북. 신의주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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