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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들도 각종 남북회담에 기대를 걸긴 한다. 통일에 대한 요구가 높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이러한 주민들의 통일 열망을 교묘하게 역이용한다. 회담에 대한 보도는 현지실황으로 보여주지 않고, 나중에 결과만 보도한다.
북한 주민들은 정보를 접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신문> 기사나 중앙방송의 목소리를 그대로 믿어버린다.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게 평화적인 회담에 기대를 걸지 말라고 강조한다. 김정일은 ‘총대 위에 진정한 평화가 있다’는 총대사상을 내놓고 평화적인 회담은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나라의 국력이 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항상 남측이 반통일적인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당국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주민들이 평화적 기분에 들떠 남한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이다.
김일성과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던 94년에도 “북남 최고위급 회담에 기대하지 말고, 평화적인 회담 뒤에 숨겨진 적들의 음모를 꿰뚫어 보고 혁명적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고 당 강연자료를 통해 선전했다.
남북회담 실패, 모두 남한 책임
북한은 회담 성과가 없으면 <노동신문>이나 TV방송에 대변인의 성명을 발표한다. ‘우리측의 끊임없는 설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측이 고의적으로 회담을 파괴했다’는 식이다.
98년 4월 당국자 회담이 있었다. 당시 남한측은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문제를 판문점에서 개최하면 비료 20만 톤 지원하겠다고 제시했지만 북한은 비료 30만 톤을 먼저 제공하고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하자고 고집했다.
회담 마감 하루를 앞둔 북측은 한밤중에 불쑥 전화를 걸어 “다음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으로 회담을 마치겠다”고 통보하고 곧바로 철수해버렸다.
2002년 4월에는 최성홍 당시 외교부 장관이 “워싱턴의 강경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이 대화에 나오게 되었다”고 발언한 것이 미국의 신문에 보도되자 북측은 “우리는 자주성을 생명처럼 여긴다. 상대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의 상대가 안 된다”며 “외교부 장관을 해임시켜야 회담에 나올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김정일, 제네바 합의 후 ‘외교의 천재’ 자부
북한의 모든 외교 행위는 김정일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김정일은 “외교일꾼들은 적들과 포성 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 전사들”이라며 신뢰를 주고 있다.
각종 회담에서 논의되는 의제들은 해당 부문 책임자들의 토의를 거쳐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북한의 외교원칙은 부서 책임자들이 임의로 더하거나 덜지도 말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쌍방이 어떤 합의점에서 팽팽하게 대립되어 파탄이냐, 성공이냐를 정하는 것은 김정일이 직접 지시한다.
94년 미국과의 제네바 합의 이후 김정일은 스스로 ‘외교의 천재’라 자부하고 있다. 유능한 외교일꾼으로 평가 받는 사람은 김정일이 지시한 대로 무조건 상대를 설득해 관철시키는 외교관이다.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