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②] ‘親김정일’에 일주일간 북한체험 권유한다

▲ 탈북자 12명 駐中 에콰토르 대사관 진입 실패(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무관)

▲ 탈북자 12명 駐中 에콰토르 대사관 진입 실패(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무관)

청진집결소에서 약 한 달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날, 선생(간수)이 감방문을 열고 “대성이 나오라”고 소리쳤다.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순간 온몸이 긴장됐다.

주변 동료들은 ‘너, 집에 간다. 나가서 만나자’며 부러워했다. 취조실에 가니 거주지 담당 보안원(거주지 담당경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청진집결소를 떠난다는 기쁨이 앞섰으나, 앞으로 닥쳐올 위험 변수들이 영화 화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향 가면 ‘반역자’로 재판받고 교화소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야, 이 새끼,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는 보안원의 말이 내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동행한 사람은 담당 보안원과 시(市) 보안서 감찰과 지도원. 그들의 호송 하에 나는 덜렁거리는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이 땅은 나를 버렸구나’

출발 3일만에 열차는 평남도 거차고개에 이르렀다. 경사가 급한 거차고개를 올라갈 때 모든 열차는 속도가 떨어진다. 열차의 속도가 거의 멈출 때, 차창을 응시하던 나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순간 “반역자를 잡아라!”고 소리치는 보안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모든 열차승객의 시선은 나에게로 쏠렸다.

허둥지둥 산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며칠 동안 먹지 못한 맥 빠진 다리로 빨리 뛸 수 없었다. 보안원과 열차승무원, 기차에 탔던 군대들이 나를 포위했다.

열차는 나 한 사람 때문에 멈춰 섰다. 기관사는 철도사령실에 ‘도주자가 발생해 (기차)세웠다’고 보고하고 하는 등 난리 났다. 결국 얼마 달아나지 못하고 덜미를 잡힌 나는 수십 명이 퍼붓는 구둣발 공세에 만신창이 되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보안원은 족쇄만 채우면 또 달아난다고, 포승줄로 결박했다. 밥도 물도 먹이지 않았다.

새벽 1시쯤 되었을까, 기차는 정전되자 멈춰 섰다. 이제 몇 개 역만 더 가면 교차역인 평남도 순천역이다. 그리고 기차를 바꿔 타면 고향, 그 다음은 감옥, 이것이 내가 맞게 될 운명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나는 보안원의 긴장을 풀기 위해 코 골며 자는 체 했다. 며칠간 꼬박 밤을 새운 그들도 술을 마시고 자기 시작했다. 나는 뒤로 묶인 포승을 방열기에 대고 비벼 풀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맨발로 승강기에 나섰다.

탈출에 성공했지만, 무엇보다 손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야 했다. 두루 길가를 뒤져 굵은 못을 얻어 들고 산에 올랐다. 부지런히 바위에 못을 가는데, 나물 캐던 처녀애가 나를 보았다. 여자애는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바구니를 버리고 마을로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신고제도가 있어 보안원에게 고자질하는 날에는 또 붙잡힐 수 있었다. 잡관목을 뚫고 정신 없이 도망치던 나는 풀숲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나는 이 땅에서 살 놈이 못 되누나, 어쩌다 반역자가 되었나?.’ 나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통탄했다. 생각만 해도 원통한 운명이었다.

먼저 못을 뾰족하게 갈아 족쇄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족쇄를 푸느라 손목을 비틀어 생긴 흉터가 아직 남아있다. 나는 다시 자유로운 새가 되어 북쪽으로, 중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잊지 못할 사장님과 헤어지기까지

열차에서 탈출한 지 일 주일만에 나는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그 길로 내가 일했던 채석장의 노반(老板, 중국사장)을 찾아갔다. 노반은 눈이 둥그래지며 고생했다며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동북지방은 위험하니 텐진(天津)으로 가겠다. 여비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노반은 인민폐 500원(한화 6만 5천원)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 돈을 여비 삼아 옌지(延吉)-텐진(天津)행 열차에 올랐다. 텐진까지 갔으나, 중국 땅 어딜 가나 내가 발 붙일 곳은 없었다. 근 1년간 텐진과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를 전전긍긍하며 방황했다.

그러던 쑤저우의 어느 한 한국회사에서 직원채용을 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면접은 보았지만, 중국말도 변변히 못하고 몸도 허약한 나를 받아줄 리 없었다. 면접에서 떨어진 나는 한국사장님을 만나 통사정을 하기로 결심했다.

정문에서 한국사장님의 앞을 막고 “저는 탈북자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렇게 해서 사장님의 보증으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부러진 발가락도 수술받았다.

내가 중국 동북에 있을 때 돌에 치어 두 번째, 세 번째 발가락뼈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썩기 시작했다.

절룩거리는 나를 본 사장님은 ‘무슨 일인가?’ 물었다. 사장님 지시에 따라 나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병원은 수술받지 않으면 발가락을 잘라야 한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수술비는 줄 테니 발가락은 자르지 말라고 당부하셨고, 그 덕에 나는 수술받았다.

퇴원한 지 얼마 안 있어, 회사에 중국공안이 달려들었다. 당시 중국은 ‘따지 헤이써꾸이(打擊黑色鬼) 100일 전투’에 진입했을 때이다. ‘불량배 소탕작전’이다.

중국공안은 통상 한국회사가 탈북자들을 보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수시로 탈북자 단속에 나오곤 했다. 내가 붙잡히면 회사는 영업정지를 당하게 된다. 국적 없는 수모는 날이 갈수록 더했고, 나의 진정한 보금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이왕 한국으로 갈 결심을 했으면, 태국이나, 베트남 쪽으로 나가라며 인민폐 2천원(한화 26만원)을 주며 등 떠밀어 주셨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北 인권, 인류의 보편적 가치 지키는 길’

2003년 2월 광저우(廣州)에 도착한 나는 여러 탈북자들과 중국 쿤밍(昆明)으로 떠났다. 한국행은 험난했지만, 자유를 찾을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

중국- 라오스 국경의 정글과 30도의 무더위, 악어와 독사의 습격을 피하며 근 한달 동안 산속에서 헤맸다. 훗날 태국감옥에서 다른 탈북자들의 말을 통해 국경을 넘던 북한사람들이 악어와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정처 없이 라오스 오지를 헤매던 우리는 라오스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국대사관에 인계해줄 것을 요구하며 1개월간 단식 끝에 태국 접경지역인 메콩강까지 추방되게 되었다. 당초 라오스 경찰이 중국으로 송환하려고 했으나, 한국과 여러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석방되었다.

일행은 태국으로 밀입국하여 드디어 방콕행 열차에 올랐다. 그제서야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재탈북과 감옥생활, 그리고 중국에서 고생했던 아픔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듯했다.

2003년 5월 20일 드디어 방콕에 도착했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과 인터뷰를 했다. 이민국 감옥은 망명을 원하는 아프리카, 동남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나는 인권이 인류의 보편적 권리이고 가치라는 것을 밝힌 “1948년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담은 국제인권선언을 접하게 되었고, 유엔에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해줄 것을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감옥에서 느낀 ‘코리아’의 위상이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코리아”라며 엄지손가락을 흔들었다. 한국이 월드컵 4강을 이뤘다는 소식을 듣고 한민족의 긍지를 찾게 되었고, 자유와 희망을 누릴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입국후 ‘하나원'(탈북자정착교육기관)을 마치고 나오던 날, 나는 주민등록증을 받아 안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지금 대학가에는 북한인권운동이 어떤 정치목적의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북한인권을 바로 알리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친북’을 외치며 북한의 참담한 인권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일주일간의 북한체험을 권유하고 싶다. (끝)

김대성(가명, 2003년 입국)
정리/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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