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1996년 北 주민들은 구리장사에 목숨걸었다

▲90년대 중반 식량구입을 위해 열차에 매달려가는 북한주민들

지방에 급한 일이 있어 고속열차(KTX)를 이용한 적이 있다.

시속 300km가 훌쩍넘는 쾌속 기차를 타고 있으면서도 실내는 조용하고 안락했다. 요금을 저렴하게 하려고 역방향에 앉았지만 불편함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기차를 타고 풍경을 구경하면서도 머리 속에는 자꾸만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죽기 살기로 혜산행 기차를 타던 일이 떠나지를 않았다.

1996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양강도 혜산을 가자면 기차를 타고 적게는 5일에서 많게는 7일을 가야했다. 그 사이 안전원들과 경무원(헌병)들의 살벌한 감시 와 폭행을 피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몸부림쳐야 했던 당시 혜산행 구리 장사를 잊을수가 없다.

온 국민이 대량아사에 내몰렸던 1996년 필자는 먹고살기 위하여 구리 장사를 하였다. 물론 나뿐 아닌 많은 사람들이 구리 장사를 위해 양강도 혜산행 열차에 몸을 실을 때였다.

당시 나의 고향에서 구리 1kg의 값은 60원이였는데, 양강도 혜산에서는 250원에 팔수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한번에 15~20kg의 구리를 혜산까지 가지고 갔다. 구리를 몸에 휴대하기 쉽게 도끼로 토막 낸 후 천으로 구리를 감싸 탄창 띠처럼 만들어 몸에 휴대했다.

당시 구리 장사는 불법이었다. 공장에서 구리를 떼어내 중국으로 넘기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단속 대상이었다. 발각되면 안전원들과 열차승무원들에게 전량 회수당하고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구리 아니면 당장 굶어죽게 된 상황에서 우리 가족은 구리 장사에 매달렸다. 한번은 안전원들의 단속이 가장 심한 청진-백암 사이를 통과하기 위하여 영하 -20도의 흑한 속에서 열차 지붕위에 올라가 비닐장막을 깔고 덮은 상태로 밤을 꼬박 보내야 했다.

지붕 위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20여명이 있었다. 기차굴이 많아 허리도 못펴고, 달리는 기차에서 동사(凍死)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야 했다. 기차 지붕 위에서 버티며 가야하는 혜산행 길은 나만이 아닌 함께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미국 미사일 공격보다 강력한 주민들의 구리 채취

기차 지붕 위 한켠에 누워서 가던 한 사람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다가 고압선에 머리가 부딪혀 달리는 열차에서 그대로 튕겨 날아갔다. 비명소리와 함께 함께 가던 동행인이 ‘사람 죽었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달리는 열차를 세울 도리도 없었다.

한밤의 열차는 그렇게 모진 생명을 떨구고 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혜산행 장사길에서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과 같았다.

구리 장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들면서 95~98년 사이 특정 군수공장을 제외한 많은 공장들이 구리 채취로 초토화 되고 말았다. 웬만한 중소공장들은 완전히 페허로 변해 버렸다. 오죽하면 당시 공장 사람들은 ‘‘전쟁이 나서 미국비행기의 정밀폭격을 받아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멀쩡한 전동기가 해체되고, 온전한 기계들도 부품이 뜯기고, 탄광, 광산의 착암기에 박혀있는 정까지 돈 되는 금속은 모두 중국으로 팔려갔다.

1996년 함흥에 있는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유산직장의 큰 굴뚝은 표면이 아연이라는 이유로 단 몇 개월 만에 밑에서부터 훌러덩 뜯기고 말았다. 굴뚝은 중국산 밀가루로 바뀌어 나갔다가 결국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통신선, 전기줄도 예외가 아니였다.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제제를 받는 북한의 대다수 국민들에게 이번 겨울이 더욱 혹독할 것이다. 이미 10년전 대기근때 돈 되는 모든 것을 팔아버린 그들에게 이제는 팔아먹을 금속도 흔치 않다. 이번 겨울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또 어디에 목숨을 걸야 할지 안타까울 뿐이다.

탈북자 김철민(가명)/2002년 국내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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