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고향은 무서워 못가…한국은 돈없어 못가

▲ 중국내 탈북자들이 거처하던 초막

지난 1월 DailyNK 중국 특파원은 길림성 뚠화(敦化)시에서 한 탈북여성을 만났다. 김영옥씨, 26세.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신포시(市)다.

이미 한 차례 북송 되어 죽음의 증산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이제 다시 끌려가면 영영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고향은 무서워서 못 가고, 한국은 돈이 없어 못 가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다시 묻는다. “과연 내가 둥지를 틀어야 할 땅은 어딘가요?”

비단 김씨뿐이 아니다. 중국을 떠돌고 있는 수많은 탈북형제들은 자기가 어디에 보금자리를 틀어야 하는지, 지금 이 순간도 절망의 목소리를 보내오고 있다. 모두 길 잃은 작은 새들이다.

1차 탈북해서 중국을 방황한 3년 세월, ‘지옥의 굴’ 증산 수용소에서 2년 세월을 보낸 그는 2003년에 다시 탈북했다. 8년 전에 헤어진 어머니를 찾고 있는 김씨의 이야기는 조국에서 버림받은 탈북자의 운명 그 자체였다.

다음은 김영옥씨의 수기

내 고향은 함경남도 신포시다. 내가 두만강을 건넌 특별한 이유는 없다. 배가 고파 무산으로 들어왔다가 중국이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넘은 것이다. 그때가 98년 4월이었다.

지금도 중국에 올 때 헤어진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매일 밤 잃어버린 어머니를 그리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노라면 눈물이 솟구친다.

‘엄마, 한 달만 벌어가지고 올게’

무산이 중국과 가까워 살기가 낫지 않을까 하고 왔지만, 별로 나은 곳이 못되었다. 중국과 장사하는 사람들은 괜찮았지만, 백성들의 생활은 신포 사람들보다 더 못살아 보였다.

그럭저럭 장마당에서 빌어먹고 사는데, 두 명의 여인이 나를 찬찬히 보았다. 한 여자가 “에그, 너처럼 고운(예쁜)애가 중국 가면 한 달에 천원은 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먹지 못해 키는 작았지만, 나는 18살의 한창 피는 나이었다.

어머니에게 “우린 왜 못 사나?”며 투정만 하던 나는 그 소리에 귀가 번쩍 열렸다. “엄마, 중국 돈 천원이면, 조선돈 3만원(당시 북한돈과 인민폐는 1:30)인데, 나 중국 가서 딱 한 달만 벌고 올게”라고 어머니에게 졸랐다.

평소에 꾸지람 한번 없던 어머니도 답답한 가슴만 쥐어 짰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와 헤어지며 했던 그 말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두만강을 건너기 위해 모인 일행은 황해도에서 왔다는 두 여자와 그리고 안내자와 나를 포함해 모두 4명이었다.

강을 건넌 우리 일행은 허룽(和龍)의 한 중국인 집에 숨어 있었다. 다음날 중국인이 와서 우리를 한 사람씩 데리고 갔는데, 내가 처음 간 곳은 식당도 아니고 어느 철도마을이었다. “내가 일할 식당은 어디냐?”고 물었지만, 중국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남자는 10년 동안 감옥 갔다 온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고 감옥 경력이 있어 장가를 못간 그는 나를 돈 주고 사온 것이다. 나중에 팔려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말도 모르는 중국 땅에서 내가 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나는 한해만 벌어 어머니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일했다. 봄에는 나물을 뜯어 팔고, 겨울에는 나무를 해다 팔았지만, 중국에서 돈 벌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차일피일 돌아가지 못하고 3년째 되던 2001년 1월 16일, 나는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나오게 되었다.

지옥에서 2년, 하루 평균 2명 죽어 나가

북송 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은 나는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 있는 증산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용소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죽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났다. 살아서 나가는 사람보다 죽어 나가는 사람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함경도에서 평안도까지는 끝에서 끝이다. 집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면회 올 사람은 더욱 없었다. 모든 것을 내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수용소의 수감자는 약 700명 가량, 내가 속한 신입반은 모두 72명이었다. 세면이 바다로 포위된 반도에 위치한 수용소에서 뛰어야 벼룩이었다.

5월이 되면 죄수들을 동원시켜 모내기를 시킨다. 어쩌다 허리를 펴는 죄수가 있으면 선생(간수)들은 무릎을 꿇리고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게 하는 기합을 준다. 그래서 허리를 펴고 싶은 사람들은 논물에 엉덩이가 젖어도 주저 앉을 수밖에 없다.

가장 무서운 것은 굶주림이었다. 먹지 못한 죄수들은 부종(浮腫)이 오면 먼저 배가 붓고, 그 다음 얼굴이 붓는다. 이렇게 3번 반복되면 허약병(영양실조)에 걸려 죽는다.

나는 그전까지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사람을 많이 본 후로 두려움도 눈물도 다 말라버렸다. 수용소에서 매일 평균 2명씩 죽어 갔다. 나와 함께 끌려갔던 사람 10명 중에 3명만 살아 돌아왔다.

함께 갔던 영실이도 영양실조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뼈만 앙상히 남은 그녀의 몰골이 떠오를 때면 나는 매일 하늘을 향해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죄수들은 나이도 다르고, 범죄도 달랐지만, 월경자는 반역죄에 속해 가장 천대를 받았다. 수용소에서는 도주자를 방지하기 위해 총반장, 감시조장, 반장, 조장, 분조(팀) 등 7~8명이 서로를 감시하게 한다. 한 사람이 달아나면 반년 이상 수감기간이 연장되기 때문에 서로 눈을 밝히다가 달아날 기미가 보이면 간수에게 고발했다.

살아 있는 개구리도 날것으로 씹어

그래도 면회 오는 수감자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나처럼 면회 올 사람이 없으면 손가락만 빨 수밖에 없다. 밥 한 덩이라도 얻어 먹기 위해서는 면회하고 돌아온 동료에게 알랑거려야 한다. 때로는 품에 안고 자는 꼬장떡(옥수수떡)을 도둑질 해먹어 간수한테서 기합을 받기도 했다.

감옥 밥은 통강냉이 아니면, 밀이나 보리 한 줌이 고작이다. 그걸 먹고 하루 종일 일하자면 나중에 숙소로 돌아올 맥도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날아가는 메뚜기를 잡아 먹던 때의 기쁨이다. 논둑에 개구리를 보고 덮쳐 그 자리에서 바로 뜯어 먹는다. 이때는 ‘내가 여자가 맞나?’는 생각을 버려야 산다. 쥐라도 한 마리 잡아 먹는 날이면 그날만은 속이 든든하다.

감옥에 잡힌 사람들은 재간이 많다. 그들은 못을 갈아 바늘로 만들어 장갑을 깁고, 목도리도 만들어 쓴다.

감옥당국은 죄수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 단추, 바늘, 젓가락 등 쇠붙이를 모조리 가져간다. 입소할 때와 면회 물을 받을 때도 검사한다. 그러나 작업 나가서 몰래 가지고 들어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못을 돌 벽에 밤새도록 갈아 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뒷부분은 구부려 실귀(실을 꿸 수 있는 구멍)를 만든다.

죄수들은 감옥을 ‘인간 대학(大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신성한 대학이름을 이 ‘죽음의 굴’과 차마 견주기가 부끄럽고, 다시 떠올리기 조차 싫다.

우리가 죄를 짓고 싶어서 지었나? 배고파 중국에 갔던 게 무슨 죄라고 감옥까지 보내는지, 자기나라 백성에게 너무 무정하다.

2003년 7월 나는 증산 수용소에서 해방됐다. 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가 나를 찾아 집을 떠난 지 꽤 오래 되었다고 한다. 혹시 어머니가 중국에 가지 않았을까? 나는 제발 어머니가 북한에 있지 않기를 바랬다. 나는 이미 감옥에서 중국에 다시 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중국으로 다시 나오는데 성공했고, 지금은 길림성 뚠화(敦化)시의 한 농촌마을에 숨어 살고 있다. 여전히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다. 하지만,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지 막연하다. 혹시 통일이 되면 만날 수 있을까, 바라고 바라는 통일은 언제쯤이나 될까…

김영옥/ 중국 뚠화(敦化) 거주

정리: 김영진 특파원(延吉) kyj@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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