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사회 10년] ⑥다시 미국으로, 유럽으로

“중국에서 한국, 다시 미국으로…그 다음은 천국이 아닐까요?”

남한에 입국했다가 2006년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을 신청했던 탈북자 A(22)씨는 “중국보다는 한국, 그보다 큰물인 미국이라는 식으로 동경 심리가 계속된다”며 이같이 독백하듯 되물었다.

A씨는 남한에 온 뒤 2년간 비교적 잘 적응했지만 먼저 미국으로 간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한국보다 미국이 낫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는 미국 이민국 인터뷰에서 “남한에서 이동전화 요금이 몇 백만원씩 나왔다. 신용불량자로 살기 힘들었다”며 거짓말도 했으나 결국 석달 뒤 강제 출국당했다. 미국의 망명 허용 요건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사는 이곳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며 자신을 타이르듯 말한 A씨는 고용안정센터에서 자동차정비와 사진촬영술을 배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A씨처럼 일단 남한에 정착했다가 또 다른 기회나 더 많은 혜택을 찾아서든, 남한 사회의 싸늘한 시선과 편견을 견디지 못해서든,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로 눈을 돌리는 탈북자의 행렬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과 영국 등 정부는 이미 한국에 정착했던 탈북자에 대해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재정착지를 찾는 탈북자들은 한국에 정착했던 사실을 숨기거나 한국 정부의 ‘정치적 탄압’을 내세우기도 한다.

이들이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곳은 미국. 2004년 미국의 북한인권법 발효가 계기가 됐다. 이 법에 따라 지난달 말까지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미국에 입국한 탈북자는 68명.

그러나 이들중 일단 한국에 정착했던 탈북자는 정치적 탄압 등을 내세운 소수다. 북한에서 미사일 제작 책임자로 일했다며 2003년 망명을 신청한 북한 군수공장 노동자 출신 이모씨가 대표적인 사례다.

2006년 망명을 신청한 마영애(여)씨도 한국 정부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당시 정부는 마씨가 여권위조죄로 실형을 선고받아 여권 갱신이 불허된 것이라며 “마씨는 정부의 탈북자 정착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1억원이 넘는 돈을 지원받아 놓고 미국 망명을 위해 탄압받았다고 거짓 주장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었다.

군인 출신의 탈북자 B씨는 무직인 채 가족의 정착금은 물론 부인이 벌어 저축한 돈을 통장째 술집 등에서 탕진했다가 이혼당하자 북한의 `살해 위협’을 운운하며 미국에 망명을 신청했으나 기각됐다.

한국 국적 탈북자의 미국 망명 가능성이 미미한 게 점차 알려지면서 국내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난민 심사 절차가 상대적으로 까다롭지 않은 유럽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서 난민증과 거주권을 받은 탈북자들은 남한 입국 사실을 숨긴 탈북자가 대부분이고, 탈북자로 위장한 조선족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에 망명을 신청한 탈북자는 415명이고 이 가운데 130명이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

국내 정착 탈북자 김성희(가명.41.여)씨는 친구의 일가족 3명이 지난해 브로커 비용 500만원을 내고 영국으로 떠났다며 “아이의 교육을 생각하면 영국도 괜찮다 싶지만 나는 아직 탈북 비용도 다 갚지 못했고, 북녘 가족에 송금도 해야 하는 처지라 결심이 여의치 않다”고 털어놨다.

영국 정부도 최근엔 이런 문제를 인식, 한국 정착 사실을 숨긴 탈북자를 가려내기 위해 한국 정부에 탈북자 지문정보 조회를 요청, 위장망명 신청 사실이 드러나면 추방키로 하는 등 문턱을 높이고 있다.

영국과 함께 재정착지로 선호되는 국가는 노르웨이. 서울에 사는 탈북자 이순희(가명.50.여)씨는 “지난해 친구가 딸과 함께 노르웨이로 갔는데, 매일같이 전화해서 살기 좋다고 얘기한다”며 “노르웨이 정부가 영어와 노르웨이어를 가르쳐 주는 데다 임시주택에서 2년간 생활하면 영주권과 함께 집을 제공한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보름에 60만원씩 지원받으면서 병원비와 학비가 무료라는 말을 듣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외국어 배우기도 쉽고 취업도 잘 되는 젊은 사람과 달리 나이 든 사람은 적응이 쉽지 않을 것 같아 포기했다고 밝혔다.

‘새롭고 하나된 조국을 위한 모임’의 신미녀 부회장은 “어느 탈북자 가족의 경우 딸은 난민 인정을 받아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아빠는 미국에서, 엄마는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탈북자들은 노르웨이의 복지 혜택에 주목하고 있지만 현지에서 난민지위를 인정받는 경우는 신청자의 10% 미만이다. 지난해 노르웨이에 망명을 신청한 탈북자 72명가운데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7명에 불과하다.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은 탈북자들이 막연한 기대에 살던 집을 처분하고 나갔다가 ‘망명’에 실패하고 재입국해 다른 탈북자의 집에 얹혀 살거나 고시원 같은 곳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환상을 갖지 말 것을 강조했다.

미국이나 영국 등지로 망명을 시도했다가 한국 정부로부터 지급받은 돈마저 모두 날린 채 되돌아오거나, 외국에서 협소한 인간관계와 생활고로 고통받는 탈북자들의 사연도 심심찮게 들린다.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밀입국했으나 ‘망명’에도 성공하지 못한 채 지금은 로스앤젤레스 인근에서 살고 있다는 한 탈북자는 지난해 1월 탈북자동지회 사이트 게시판에 “한국에서 살 때가 너무도 행복한 때였다”는 내용의 글을 띄워 탈북자들의 무분별한 외국 `망명’ 꿈에 경종을 울렸다.

그는 자신의 미국행을 “떠돌이 근성” 때문이라면서 “멕시코의 한인 하숙집에서 브로커를 구해 적지 않은 돈을 주고 미국 밀입국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 재산을 탕진했다”고 탄식했다.

무지개청소년센터 윤상석 팀장은 “탈북 청소년의 경우 영어 습득 등 자기계발 차원에서 북미나 유럽으로 떠나는 경우도 많은데, 다시 시작해 보자는 의욕을 갖고 출국하지만 현지에서 문화나 정서의 벽, 외로움을 심하게 느끼고 돌아온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같이 국내의 정착지원 혜택을 누리다 서방 선진국의 혜택을 더 누리기 위해 위장망명하는 탈북자에 대해 제동을 걸기 위해, 입국 탈북자가 제3국에 망명을 신청한 경우 정착지원금 감액과 함께 행정적 제재를 가하는 것은 물론 사안에 따라 형사처벌도 추진하기로 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