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사회 10년] ①꿈 이룬 이웃들

“탈북자들이 자꾸 일자리가 없다고 말하는데 일을 가려서 그렇지 일자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 항상 부자라는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살면서 청소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2004년 한국에 온 탈북 여성 A씨는 현재 빌딩과 재수생 학원을 청소하는 청소업체 직원이다.

매일 건물 3곳을 옮겨 다니면서 남들이 깊이 잠든 새벽 3시부터 열심히 청소를 해서 그가 받는 월급은 120만원이다.

40대 중반이어서 일반 회사는 나이 제한으로 취업할 수 없고 언어 소통 문제 등으로 일반 식당 취직도 어렵자 A씨는 기술이 없는 자신에게 적합한 일은 이 일이라고 생각하고 인력소개소를 통해 일자리를 잡았다.

그는 “탈북자중에는 북한에서 못먹고 배고파서 온 사람이 많잖느냐. 그런데 일이 천하다고 가린다는 건, 그건 아닌 것 같다”며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생각만 갖고 있다면 탈북자들도 남한에서 얼마든지 직업을 구해 다른 이의 도움없이 스스로 경제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04년 탈북한 유금단(38.여)씨는 서울에서 6623번(풍양운수) 시내버스를 모는 여성 운전기사다.

키 150㎝의 작은 체구지만 대형 버스를 몰고 다니면서 ‘시민의 발’ 역할을 하고 있는 유씨는 남한 사회가 낯설고 힘들 때가 많았지만 버스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악바리처럼 버텼다.

그는 “때론 말못할 고민에 피눈물이 나지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럴 때마다 조금 더 참자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는다”며 “더 노력해서 꼭 성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2003년 탈북한 이옥실(43.여)씨는 7월 초 노원구에서 편의점을 열고 어엿한 점주가 됐다.

이씨는 국내 입국 후 음식점 주방일과 토스트점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밑바닥부터 경험을 쌓은 뒤 시민단체인 굿피플이 운영하는 탈북자 정착교육기관 자유시민대학에서 8개월간 창업.취업교육을 받아 창업에 성공했다.

이씨는 개점 첫달 435만원의 이익을 내면서 `경영자’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2005년 입국한 탈북자 J(38.여)씨는 하나원 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온 뒤 고용지원센터를 통해 골프연습장 직원으로 채용됐다.

J씨는 “중국에서 왔어?”라며 놀리거나 대놓고 “이런 애들 도와주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는 손님들의 말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덕분인지 J씨는 얼마 뒤 주위의 칭찬을 들을 정도로 직장에 잘 적응했고 틈틈이 공부해 컴퓨터 자격증을 2개나 땄다. 대학 입시에도 도전할 꿈을 갖고 있다.

어느듯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버스 운전기사나 자동차 세일즈맨, 식당 종업원, 고구마 농사를 짓는 농업인으로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 돼가는 성실하고 소박한 탈북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목욕탕, 식당, 건설 현장 등에서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해 알뜰살뜰 모은 돈과 정착금으로 작은 가게를 낸 탈북자들도 수십여명이다.

정부나 단체의 지원과 다른 사람의 도움을 과분하게 생각하면서 과욕을 버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하루 끼니를 때우는 것이 너무 힘겨웠던 북한에서의 삶, 사선을 넘던 탈북 과정을 생각하면 못해 낼 일이 없다”는 것이다.

탈북자에 대한 남한 사회의 ‘편견’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노력하는 자세, ‘일확천금’의 헛된 꿈을 버리고, 자신의 분수를 알고 눈높이를 낮추며, 건설 노동자건 환경 미화원이건 식당 종업원이건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말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자세다.

2003년 한국에 온 김미선(가명.28.여)씨는 많은 탈북자들이 외면하는 식당에서 월급 80만원을 받으며 파스 투성이의 몸으로 일해 3년만에 3천만원을 모았고 그후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전산 세무회계를 공부해 자격증을 땄다.

임신 막달까지도 일했다는 그는 “북한에서는 그렇게 아등바등 해도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지만 남한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적어도 그 대가는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더라”며 “사선을 넘어 온 우리인데 무서울 게 뭐 있나. 죽기 살기로 적응을 위해 노력하면 나중엔 결실이 있다”고 강조했다.

전북 정읍에서 남편과 함께 쌀과 호박고구마 농사를 짓는 허모(34.여)씨는 마을에서 ‘억척 새댁’이자 알부자로 통한다.

많은 탈북자들이 농사는 고되다며 기피하고 생산직마저 외면하지만, 대학공부를 못한 데다 북한에서 농사를 짓던 자신에게는 차라리 농사가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허씨는 “남한에서 만난 남편을 따라 농촌으로 내려와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새로워 보이는 일 뿐이었다”며 “동네 부녀회나 반상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농사 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고 말했다.

1999년 입국한 강창만(가명)씨는 “북한에서는 단칸 방에서 부모형제가 함께 살고 마을 공동변소를 사용했는데 남한에 와서 정부로부터 받은 방 2칸에 화장실 딸린 17평 임대아파트가 궁궐같았다”며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해준 대한민국이 너무 고마워 막노동을 가리지 않고 하루 `알바’를 3개나 뛰었더니 5년만에 32평짜리 내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강씨는 “내 집을 장만하고 국가 임대주택을 내놓는 날 펑펑 울었다”며 “이젠 북한에서 부모형제 누구든 나오면 이 집에서 같이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다짐했다.

2004년 입국한 30대의 오은수(가명.여))씨 등 5명의 탈북 여성은 울산의 한 공장에서 남자들도 기피하는 5-40t짜리 천정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다.

1999년 입국한 김모(38)씨는 개별 화물 운송을 시작하면서 사업자 등록을 하는 바람에 정착 지원금이 끊긴 경우.

그는 “지원금에 의존하다보면 몇년이고 허송세월 하게 될 것 같아 일단 부딪혀 보자는 생각에 화물 운송을 시작했다”면서 “의존할 데가 없으니 오히려 의욕이 높아져 이듬해에는 용접기능사 자격증도 따게 됐다”고 말했다.

2006년 그 자격증을 갖고 경남 거제도로 내려가 조선소에서 용접기능사로 일하는 김씨는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들은 최소 1년은 고생해야 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면서 “당장 편견이나 오해에 시달려도 나중에 반드시 풀리는 때가 오는 만큼 적극적인 마음가짐으로 기술부터 배워야 한다”고 귀띔했다.

대우건설에서 7년간의 용접공 생활 끝에 본사 과장으로 일하는 탈북자 이모(51)씨는 “탈북자들이 처음부터 쉬운 일만 찾지 말고 특히 돈만 보고 직업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며 “자기가 하는 일에 전문가가 될 때까지 힘든 상황을 참아내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새로운 인맥을 쌓는 데도 적극 나서 구직 과정에서 도움을 얻거나 정서적 유대감을 높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2000년 입국한 황모(28)씨는 현재 지엠대우자동차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한다.

외국인 특례 전형으로 2001년 4년제 대학에 입학, 5년만에 졸업장을 딴 황씨는 “1학년때는 새 친구도 사귀지 않은 채 성적에 신경썼으나 성적은 거의 바닥 수준을 면치 못했는데,오히려 2학년때는 축구 동아리에 가입하고 과 모임에도 빠지지않고 참석하면서 친구를 많이 사귀었더니 시험 정보를 공유하거나 책을 빌려볼 수 있어 성적이 쑥쑥 올랐다”고 말했다.

황씨는 이 경험에서 깨달음을 얻어 남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자동차 영업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다.

2001년 입국한 김영옥(37.여)씨는 “한번 잡은 인맥은 놓지 않았다. 문안 인사도 자주 드리고 신세를 지면 반드시 작은 선물을 보내서라도 고마움을 표시했다”며 “이렇게 인맥관리를 하다보니 일감이 꾸준히 들어오고 그만큼 돈도 벌어 7년만에 경기도에 집을 살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이들처럼 북한에서의 어려웠던 삶을 잊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탈북자들에게 정부의 정착 지원금은 마음대로 써버리는 생활비가 아니라 거액의 목돈이었다. 이들은 ‘짠돌이’ 살림살이를 강조하기도 한다.

2002년 입국한 노모(37.여)씨는 남한에서 얻은 첫 직장인 우편발송 대행업체에서 올해로 6년째 일하고 있다. 최근 주임급으로 승진한 그는 “정착 지원금은 처음부터 ‘없는 돈’이라고 생각했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적금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앞에 예로 든 김미선씨는 “5년간 택시를 탄 일이 열 손가락에 들지 않고 웬만하면 버스도 타지 않으며 옷은 사회복지관 ‘아나바다 장터’에서 2천~3천원을 주고 구입한다”며 월급을 타는 족족 무조건 적금통장에 넣어버렸다고 말했다.

경기도 부천의 재래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는 문모(33.여)씨는 정착 지원금을 지급받던 때에 비해 자신이 번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 요즘 한달 생활비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2001년 입국한 그는 “남한에 들어온 직후에는 절약이나 저축과 같은 경제 관념이 희박했다”면서 “그러나 3년전부터 옷가게를 하면서 단골을 만들어 꾸준히 매출을 늘리고 원가 절감을 위해 소비 규모를 줄이는 방법도 스스로 깨닫게 되면서 더 알뜰 살림을 한다”고 말했다.

이들 탈북자는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노력하면, 처음에는 편견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마음을 바꾸고 도와준다고 이구동성으로 강조했다.

김영옥, 김미선씨는 “일부 편협한 남한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리 편견이 심하다고 해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며 “이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까지에는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여기고 도와준 주변 남한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고 입을 모았다.

‘자유시민대학’의 양영창 사무처장은 “탈북자들에게 정부나 민간단체가 취업을 알선해 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탈북자 스스로 막연한 취업에 나서기보다는 직업훈련.교육 기간에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업종이나 분야를 골라 일자리를 찾아 노력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조언했다.

많은 탈북자들이 남한 각지에서 맡겨진 몫을 다하며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착하고 있지만, 대부분 자영업이나 민간회사에 근무하며, 공직 진출은 아직 미미하다.

탈북자의 공무원 진출은 10명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 산하 기관과 국가정보원, 국방부 등 극소수 기관에서 탈북자나 북한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외교통상부, 경찰청, 경제 부처에서 근무하는 경우는 없다.

통일부 관계자는 “현재 탈북자 3명을 채용해 탈북자 정착 지원 등의 업무를 보도록 하고 있다”며 “이들은 주로 공채를 통해 선발돼 계약직으로 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경찰청 한 관계자는 “경찰 임용절차는 경찰공무원임용령과 시행규칙에 정해진 대로 신분에 따라 다른 잣대가 적용되지 않는 만큼, 탈북자라고 해서 특별히 우대하는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불이익도 받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공개 채용을 거쳐 중앙 정부기관에서 6급 공무원이 된 한 탈북여성은 “공직 사회에 탈북자 고용 할당제를 도입하면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효율적인 지원 제도를 도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시민대학’의 양영창 사무처장은 “정부가 북한 정보와 관련된 곳 외에는 탈북자들에게 공직을 개방하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하고 “하지만 북한의 학교 교육 내용은 남한과 많이 달라 통일이 돼도 남한 교사들이 곧바로 가르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탈북자 출신 교사가 필요하다”고 교사로 채용 가능성을 제언했다.

그는 또 “현재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많은 탈북자들을 국가의 보건의료.복지 사업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강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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