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대학생 스토리]“테러집단 누명쓰고 中 무장공안에 체포당해”

▲ 택시를 검문하는 중국 공안 ⓒ데일리NK

지금은 남한에 들어와 개방과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몇년 전만 해도 필자는 세상이 모두 북한과 같은 줄 알았다.

북한에 살면서 느낀 가장 큰 딜레마는 ‘문제는 있는데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가 굶어야 하는지, 우리 나라(조선)는 왜 이렇게 가난한지 알 수가 없었다. 문제는 온 사방에 널렸지만 대안이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행복이란 것은 막연하기만 했다.

게다가 북한 체제의 폐쇄성은 내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옥죄고 있었다. 우리만 굶고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체제를 비판하고 벗어나려고 애썼겠지만, 언론이 차단 당하고 외부 세계의 정보를 접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랬기에 만약 북한 체제가 옛날처럼만 지속됐어도 나의 탈북은 이뤄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중국이란 낙원이 있는 줄 몰랐다면, 난 벗어나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혹시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어렸을 때부터 북한이 지금처럼 어려운 건 아니었다. 나는 1980년대 생으로 황해도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인민학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과수원 한 가운데에 있는 외갓집에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별 어려움 없이 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물자가 형편 없이 부족하진 않았다.

인민학교 때부터는 가족이 있는 회령으로 올라와서 살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조금씩 물자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어려서 제대로 감지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89년 쯤부터 물자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지 않았나 싶다.

그 때부터 계속해서 나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의 인생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민학교 3학년 때쯤 성적이 급격하게 뛰어올라 기쁘기도 했지만, 뛰어난 성적도 나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대학교에 들어가던 97년도에 우리 집안은 파산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어려워지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드디어 이런 순간이 왔구나 싶었다. 소규모로 장사를 하다가 밑천까지 말아 먹고 말았다. 우리 집안은 어쩌면 초기 북한 시장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99년도에는 산에 나무하러 가신 아버지께서 촉한(찬 기운에 몸져 누움)을 앓으셔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너무 굶고 지친 탓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외아들로써 가장의 역할을 맡은 나는 뭘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부터 북한 체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될 때는 금방 지나갈 줄로만 알았던 그 굶주림, 가난이 일시적인 걸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됐다. 나라가 멸망하면 출세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진로조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 중국에 대한 소식을 듣기 시작했다. 뭔가 희망이 보이는 나라, 먹는 문제로 고민하는 일은 없는 나라라는 말이 내 귓전을 때렸다.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결국 1999년 초 한겨울에 두만강을 넘었다.

17평에 13명 모여, 한 달 만에 성경 30번 통독

중국에 와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확인했다. 사람이 이렇게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북한에서 들은 소식들이 사실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곳이 나의 천국은 될 수 없었다. 난 불법 체류자였고, 공안에게 잡히면 북송 당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면서 몇 날 며칠을 굶었다. 목이 마르면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을 먹었다. 정말로 죽고만 싶었다.

처음에는 시장에서 구걸을 했다. 그 때 어떤 할머니를 만나 목욕탕 때밀이로 일하게 됐다.

하지만 결국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당시 옌지(延吉)는 탈북자 색출이 너무 심해 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시안(西安)으로 가게 됐다. 시안은 중국 깊숙한 내륙지방으로 연길에서 기차로 3일을 걸리는데, 거기까지 간 이유는 무엇보다 공안의 단속이 조금 덜 할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 곳에 가니 이미 수많은 탈북자들이 선교사가 마련한 거처에 거주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17평짜리 아파트였는데 남자 13명이 모여 있었다. 집 안이 빽빽했던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곳은 98년부터 존재한 북한 선교사 훈련소였다. 선교사님은 북한 선교를 꿈꾸면서 약 100여명 가량의 탈북자들을 교육하고 있었는데 때문에 우리들은 하루 종일 성경 통독을 해야만 했다. 외출은 보안상의 이유로 절대 금지됐다.

불평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우리로서는 선교사님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가슴에 와닿지 않은 성경을 하루 종일 읽는 것은 고역이었다.

사실 선교사님 입장에서는 우리가 기독교에 관심이 없다면 보살펴 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해를 한다. 혼자서 그 많은 탈북자들을 돌보시는 일도 적잖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현장에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사람이 함께 모여 있으니 맨날 하는 얘기는 선교사님에 대한 불평이야기였다. 13명의 불평 불만이 증폭되어 그 자리가 또 다른 이름의 수용소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힘들었다.

하루 10시간씩 성경을 읽었다. 통독 테이프로 한국어 성경을 읽었는데 속도가 매우 빨라 하루면 1독을 할 수가 있었다. 테이프에서 나오는 소리를 그냥 듣기만 하면 됐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후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그 테이프를 들었다.

처음에는 말이 다르고 성경이 어려워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많았는데 그것도 30번을 계속 읽으니 조금씩은 들어왔던 것 같다. 체계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많이 읽은 만큼 성경에 대한 지식도 꽤 늘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들어간 지 단 한 달 만에 대대적인 수색 작전으로 우리는 전부 잡혀 북송되고 말았다. 그게 2001년 6월 달이었다.

정말로 굉장한 진압작전이었다. 모두 도합 76명의 탈북자들이 잡혔는데, 여러 곳에 분산돼 있던 거처들이 모두 진압당했다. 진압 당시 중국 공안들은 모두 철갑모를 쓰고 방탄조끼에 실탄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2개 중대가 동원됐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내부 배신자가 있었다고 했다. 북한 보위부에 신고한 그 사람은 우리 거처를 모조리 불어댔고, 우리가 비밀무장테러집단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공안들이 그토록 중무장을 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나온 책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에도 상세히 기술돼 있다. 저자인 최광 선교사가 내가 만난 그 선교사다.)

그 후 선교사는 바로 대한민국으로 추방됐다.우리는 북송돼 혹독한 구타와 조사에 시달리게 됐다.

원래 맨 처음 북송되면 보위부가 조사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남한 사람과의 접촉과 선교사, 또는 기독교를 접했느냐의 여부이다.

이 두 가지가 걸리면 필히 정치범 수용소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런데 우리는 집단으로 선교 훈련을 받다가 잡혔으니 조사 기간이 길고 엄했다.

중국 감옥에서 두 달 가량을 있다가 북송돼 70일 가량 보위부에서 조사받았다. 정좌자세로 너무 오래 앉아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욕창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선교사 밑에 3년 정도씩 있었던 것에 비해 나는 한 달 가량만 있었기에 5번 조사 받는데 그쳤다. 조사받으면서 나는 무조건 예수라는 인물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한 달 밖에 없었기에 성경도 잘 모르고, 기독교는 절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체포 후 1년 정도 감옥에서 시간을 보낸 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대부분은 수용소행이었고 그 중 일부는 죽은 것으로 들었다.

다시 재탈북하기까지…

감옥에서 나온 것이 2002년 4월 달이었다. 이후 2002년 7월1일에 7.1경제개선조치라는 것이 김정일로부터 내려왔다. 시장 합법화를 주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

기대가 정말로 컸다. 뭔가 바뀌리라는 생각을 가졌고, 북한도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중국에서 하도 고생을 했기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간 이후에는 절대 다시 중국을 가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북한의 현실을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경제개선조치도 북한을 그렇게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당시 직장에 취직을 해서 8월 1일에 첫 월급을 받았다. 경제개선 조치 이후 처음 받는 월급이었다. 그런데 1200원 월급을 받고 시장에 가보니 쌀 1kg이 500원 가량 하는 것이었다.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경제개선조치 이후 인플레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직장에서 하는 일도 엉망이었다. 월급을 주기 위해 일을 시키기는 하는데, 전신주를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일을 했다. 기계도 쓰지 않아 삽질을 해가며 땅을 파는데, 비만 오면 원상태로 돌아갔다. 너무나도 허무했다.

경제개선 조치에도 희망을 잃은 나는 결국 한국행을 다시 한 번 시도했다. 중국으로 가서 연길을 떠돌며 선교사를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단속이 심해서 그런지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다. 알던 인맥은 모두 끊겨버렸다.

그렇게 다니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결국은 인터넷을 통해 인맥을 찾을 수 있었고 2002년도 10월 달에 아는 사람을 거쳐 지금 다니는 교회의 도움으로 결국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게 결국은 자유를 찾아 이어졌던 탈출은 성공할 수가 있었다.

한국에 와서야 이제 자유를 좀 느끼면서 살고 있다. 북한은 고향이었지만 체제가 나를 옥죄었고, 먹고 살길을 내주질 않았다. 중국은 먹고 살만하긴 했으나 불법 체류자 신분은 항상 내게 따라다니던 딱지였다.

이 대한민국의 자유가 북한에도 있기를 소망한다. 언젠가 통일될 날을 기대하며, 나는 그 때를 준비하려고 한다. 북한 인권이 개선되기를, 탈북자의 한 사람으로서 열심으로 바란다.

/이성(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