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교사 김은철의 남한생각] 현충원 참배, 남북주민 동시 기만

<최진이의 新북한여성론>을 연재해오던 최진이씨가 개인적으로 이유로 연재를 중단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이번부터 <탈북교사 김은철의 남한 생각>을 새로 연재합니다.

김은철씨는 1970년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으로, 관서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하고 고등중학교 물리교사로 재직중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현재 유명 인터넷 쇼핑몰의 팀장으로 재직중이며 남한 정착에 성공한 탈북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동안 연재해주신 최진이씨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김은철씨의 새로운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호응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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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대표단 현충원 참배를 보도한 언론

 

연휴 첫날 아침 뉴스를 들으니 북한 노동당 김기남 비서를 비롯한 8.15 민족대축천 북측 대표단이 현충원을 참배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바야흐로 남북 화해의 물결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건가?

얼마 전 ‘맥아더 동상 까부수기’를 선동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현충원 참배라니! ‘이게 웬 쇼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혼들에게 헌화하는 것은 외교사절들이 방문국의 국민을 향한 도의 내지는 신뢰와 우의의 표현 행위이다. 허나 그 영혼에는 축복받을 대상과 저주받을 대상이 있다.

김일성이 감행한 6.25 동족상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전범자의 아들이 사과 한마디 없이 부하를 시켜 현충원에서 ‘쇼’를 하는 것을 감개무량하게 받아들이실까? 결코 아니라고 본다.

그럼, 북한 주민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북한 대표단이 현충원을 방문하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문득 북한의 정치범수용소가 생각났다. 난데없이 웬 정치범수용소냐고 물을 사람들이 있겠지만, 북한 출신인 필자는 현충원을 방문하는 대표단과 북한 주민들의 처지가 맞물려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독재자의 참배 지시, 남북 주민 모두 기만

필자가 살던 동네에 이름 난 화가가 있었다. ‘1호 화가’로 김일성 부자를 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명문 화가 중 한 명이었다.(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는 1호 화가라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릴 자격이 주어진다 – 편집자)

그런데 어느 날 화가가 김일성 얼굴을 그렸는데, 그만 어린 딸이 그것을 가지고 동네를 다니며 자랑하다 아이들끼리 장난치면서 순간 그림이 찢어졌다.

그날 밤 화가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그 가족은 십여년 동안 아빠의 생사를 모르고 ‘반혁명분자 가족’의 딱지를 쓰고 삶의 밑바닥을 쓸며 살았다. 딸들은 정말 예뻤지만 크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알게 되었을 즈음엔 촌녀(村女)로 버림받았다.

현존하는 ‘죽음의 수용소’를 갖고 있는 독재자가 대한민국을 위해 순국한 열사에게 참배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은 북한주민들에게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전체 국민들을 상대로 약을 올리는 행위나 다를 바 없다.

대한민국의 얼빠진 몇 개 언론은 이것을 위대한 결단쯤으로 보도했지만 잔혹한 독재자가 그 정도 쇼를 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북한 대표단은 현충원에서 머리를 숙이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저 독재자가 저지른 쇼의 ‘얼굴 마담’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하수인들은 남한의 현충원에서 고개를 숙여도 아무 일 없는데, 일반 주민들은 어린 아이가 김일성 초상화를 갖고 놀다 훼손했다는 이유로 그 아비가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이 오늘의 북한이다.

김정일은 이제 남한국민을 만만하게 본다

그런데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이런 쇼를 왜 북한당국은 기획했을까?

그것은 남한을 그만큼 만만하게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남한에 살면서 남북한 주민들의 애국심을 견주어 볼 때가 더러 있다. 1994년 북한 핵위기 때 필자는 중학교 교사였는데, 전선탄원(戰線歎願)을 했다. 전쟁이 나면 나를 군대에 보내달라는 뜻이다. 아마 그때 수 만 명이 전선탄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세기의 태양인 김일성 부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결사적으로 보위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 영토를 1cm라도 침범하는 자들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교양’에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충실했던 것이다.

2002년 서해교전이 있던 날 필자는 대한민국이 조금 무서웠다. 지금 서해에서는 전투가 벌어져 아군이 사망했는데도 어쩜 국민들은 저리도 태평스러울까? 북한 같았으면 응징하자는 모임이 경쟁적으로 조직되고 전선탄원 한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물론 남한이 북한처럼 되라는 말은 아니다. 남한 국민들의 내적 애국심은 북한의 그것보다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IMF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보면서 남한의 저력을 새삼 느꼈다.

그러나 국가의 보호를 받는 국민이라면 최소한의 정신과 자세는 필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남한을 북한은 만만하게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뭘 요구하고 무슨 행동을 해도 다 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

독재자 김정일의 잔머리가 놀라울 뿐

이러한 현상을 과연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햇볕정책의 성과라고 기뻐해야 할까. 지금 외투를 벗는 쪽은 남한인가, 북한인가? 남쪽에서 북한대표단이 아무리 쇼를 하는 순간에도 북한 주민들은 “적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자”는 교육을 받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일이긴 하지만,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현충원 참배를 정중히 거절했어야 옳았다. 북한 출신인 필자의 견해로는 그렇다.

현충원 참배 이후, 앞으로 북한을 방문할 남한 사절단이 김일성 동상에 헌화하는 것을 당연한 의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또 김일성 헌화 문제로 남한 내에서 남남갈등 더욱 깊어질까 심히 우려된다.

김정일은 부하들에게 ‘별 것도 아닌’ 현충원 참배를 시켜놓고 나서, 남쪽의 갈등은 몇 배로 부추기려 하고 있다. 독재자의 잔머리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김은철

1970년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
관서대학 물리학부 졸업
고등중학교 물리교사
1997년 탈북, 1999년 입국
현재 인터넷 업계 종사, <백두한라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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