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조총련②]“일방적 北추종으로 쇠락”






▲1959년 시작된 귀국사업 당시 귀국선을 타는 교포들(左), 귀국사업으로 북송됐다 탈북한
고정미씨와 일본내 NGO들이 11월 6일 조총련의 귀국사업 등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右)
내년 출범 55주년을 맞은 조총련이 그동안 재일 동포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보다는 북한 당국만 추종하는 ‘이중대’ 역할만을 해오면서 동포들의 이탈현상이 가속화 되고 있다(기획①참조).


특히 북한 핵문제와 납치문제, 인권문제 등으로 일본 내 대북여론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최근 들어서는 사실상 존폐위기에 처해있다.


조총련은 그동안 애국 사업 등 재정사업을 비롯해 내부 조직사업, 조선학교를 통한 민족교육 등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의 실상은 김부자에 대한 우상화와 북한체제 선전, 북한 해외공작 지원 및 연계, 북한 해외 비자금 조성이었다.   


조총련의 전성기는 북한으로부터 ‘교육 원조비 및 장학금’을 받기 시작한 1950년대 말부터 재일동포 귀국사업이 시작될 쯤인 1960년대 초반까지다. 그 후 한동안 현상유지 및 정체상태가 지속되다가 귀국사업이 침체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세력약화가 시작됐다. 


1990년대에 들어와 김일성 사망과 북한의 경제난 등이 조총련의 조직 약화를 불러왔다. 특히 2000년대 와서는 북한의 핵개발과 납치자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일본 내에서 ‘공공의 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귀국사업으로 北 실체 알려져…교포 이탈시작


조총련이 승승장구 하던 1960년대에는 재일동포에게 ‘고국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귀국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실시된 귀국사업으로 재일교포 및 가족 9만3천여 명이 북한으로 이주했다. 당시 일본 총리는 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의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였다. 그는 조총련과 귀국사업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고 1959년 키시(岸)내각이 적십자국제위원회에 중개를 의뢰해 귀국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당시 조총련은 ‘지상낙원으로의 인도적 항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귀국운동을 추진했다. 조총련의 귀국운동은 일본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재일 교포들에게 ‘북한에 가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소위 ‘지상 낙원론’을 선전했다. 



그러나 귀국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난과 억압이었다. 귀국사업으로 북한에 갔다가 탈북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귀국자만 170여 명이다.


이 탈북자들에 의해 북한의 실체가 알려지면서 조총련의 귀국사업이 허구였다는 것이 교포들 사이에 확산됐다.


복송됐다 돌아온 사람들은 초기에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북한의 실체에 대해 침묵해야 했다. 또한 당시만 해도 교포사회에서 조총련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귀국사업에 대해 함부로 시비를 걸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의 실체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최근 양상은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1963년 북송됐다가 37년만에 탈북한 재일교포 2세 고정미 씨는 조총련의 귀국사업 실체를 폭로하면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중이다.


이와 함께 ‘북조선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회’를 비롯해 ‘납치피해자 가족회’, ‘납치피해자 구원회’, ‘난민 구원기금’, ‘NO FENCE’, ‘특종 실종자문제 조사회’ 등의 일본 내 NGO들이 귀국사업을 한 조총련을 규탄하는 운동을 계속해서 벌이고 있다.

박두진 전 조선대 교수는 “애국운동이란 명분 하에 시작된 귀국사업의 실체는 남한에 비해 체제가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대남전략 차원에서 동포들을 이용한 것”이라며 “귀국사업은 재일동포들을 김일성 김정일 독제의 지배하에 놓으려는 의도로 추진된 것”이라고 밝혔다.   


◆‘모국방문사업’으로 ‘남한 낙후됐다’는 조총련의 선전 거짓으로 밝혀져








▲1975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조총련계 모국방문단 서울시민 환영대회 모습ⓒ국가기록원


조총련의 귀국사업과 때를 같이해 한국정부는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을 대상으로 모국방문사업을 진행했다.  


1975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조총련계 동포들이 한국을 방문해 추석성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이 사업은 조총련에서 이탈하거나 불만을 갖고 있던 교포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해방 후 65만여 재일동포 가운데 95% 이상은 남한 출신이었다. 30여년 만에 모국을 방문한 교포들이 부모 형제와 재회하는 감격스런 장면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업이 활기를 띠게됐다. 


민단 기관지 ‘민단신문’은 모국방문단 사업이 시작된 이래 2005년까지 조총련 산하 재일동포 5만570명이 남한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모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교포들에 의해 조총련이 그동안 선전해온 남한의 낙후상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조총련 간부 및 상공인들이 비밀리에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다. 귀국사업의 부작용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한국 모국방문사업이 인기를 끌면서 사실상 조총련이 주도하던 재일동포 사회가 변화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당시 모국방문사업이 큰 호응을 얻자 김일성은 조총련의 조직강화를 위한 특별지시를 하달했다. 조총련은 중앙과 지방조직을 재정비하고 대남사업에 용이하도록 70년대 말까지 우수 인력으로 조직을 정비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80년대 접어들어 김일성은 ‘애국사업혁신’ 이라는 지침을 하달했다. 따라서 조총련 중앙의 핵심일꾼들은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의 조직이탈방지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남쪽으로 기울어 가는 여론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익명을 요구한 조총련 간부 출신 A 씨는 데일리NK와의 통화에서 “모국방문운동이 실시되기 전에는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이고 많은 국민들이 생지옥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조총련은 선전했다”면서 “그런데 모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동포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놀랬고 그 사실은 교포사이에 급속히 퍼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귀국사업으로 북한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조선(북한) 국적의 동포들이 한국 국적으로 바꾸는 동포들이 증가했는데, 모국방문사업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부추겼다”고 덧붙였다.


◆조총련 헌금 강요로 교포들의 원성 높아져


조총련이 오랫동안 애국사업을 심혈을 기울여 추진해왔다. 애국사업은 조총련이 벌인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활동을 말한다. 사실 애국이라는 명목으로 실시됐지만 반강제적으로 교포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총련이 대북 ‘식료품 보내기 운동’으로 북한에 보내진 쌀,설탕,조미료, 참기름 ⓒ연합


대표적으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헌금과 모금, 물자 보내기 운동 등이 있다.


또한 애국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조총련계 동포들의 이탈방지 및 조직확대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애국사업이 반강제적으로 진행되면서 애국사업은 교포들의 더 큰 원성에 직면하게 됐다. 


조총련은 3년마다 열리는 전체대회 등을 통해 애국사업을 전체 조직 과업으로 제시하고 애국사업을 가열차게 진행 할 것을 계속 독려해 왔다. 조총련은 충성헌금·선물을 조총련계 상공인과 동포들로부터 각출하기 위해 각 조직별로 경쟁적인 충성헌금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말단 조직인 분회조직을 통해서 조총련 계열 동포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 강제모금하기도 했다.


조총련의 애국사업은 1980년대 이후 다양해져 헌금뿐 아니라 공장·플랜트에서 생활관련 물품까지 다양한 물자를 지원했다. 이와 함께 선물헌납운동에서는 조총련계 상공인들의 투자유치와 생산시설 기탁에서부터 김일성·김정일의 개인적 사치를 충족시키기 위한 고급승용차·최신전자제품·귀금속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조총련의 애국사업으로 1994년까지 매년 6∼8억 달러를 북한에 송금해 북한의 주요 외화획득 수단이였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불황으로 인해 조총련계 기업과 업소들의 경영부실이 나타나면서 조총련계  금융기관들이 파산하기 시작했다. 애국사업도 급격히 축소됐다. 


이러한 조총련의 반 강제적인 헌금 각출 운동 등으로 교포들의 원성이 높아져 조직 이탈이 발생하고 무엇보다 북한의 현실이 알려지면서 애국사업의 명분이 사라졌다. 현재 애국사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조총련은 일본정부의 전방위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애국사업 명목으로 해온 헌금과 물자 보내기 운동은 중단된 상태다. 


“北과 합영사업, 강제적 헌금과 다름 없어”


애국사업이 조총련 동포들을 주축으로 진행된 사업이라면 ‘합영사업’은 북한이 조총련계 기업을 대상으로 벌인 사업이다. 합영사업에 대해 김일성은 ‘애국심의 발로’라며 기업들의 적극적인 사업 가담을 추동했다.


이 기업들은 북한의 비경제적 접근과 불황 등과 겹쳐 큰 실패를 겪고 만다. 합영사업의 실패를 통해 조총련계 상공인들은 북한과의 사업을 꺼리게 되고 이는 조총련의 권위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조국과 야심차게 사업을 벌이지만 북한의 시장경제 몰이해와 투자환경의 미비로 하나 둘씩 실패하는 조총련계 기업들을 보면서 상공인들은 북한의 경제적 환경에 대해 깨닫게 됐다.


1980년대 이후 김일성은 북한의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기업을 북한에 유치하려는 ‘합영법’을 제정하고 ‘합영사업’을 벌인다. 그러나 폐쇄된 북한 사회에 투자를 꺼려 사업이 저조하자 북한은 조총련계 기업들을 유치하는 사업을 적극 벌이게 된다.


그러나80년대 중반 조총련의 주요 활동으로 꼽히는 합영사업도 북한의 인프라 미비, 에너지 공급 불안정, 계약 불이행 등으로 실패하기에 이른다. 특히 북한당국의 지나친 간섭과 시장경제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조총련계 기업은 손해만 보고 만다.


특히 90년대 접어들면서 북핵문제로 인해 한반도가 긴장되면서 조총련계 기업들의 대북투자 심리가 크게 위축된 부분도 합영사업 실패를 부추겼다.


북한의 합영법이 제정된 1984년부터 1995년까지 설립된 조총련계열의 대북 합영기업체수는 131개였으나, 최근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기업은 조선합영은행, 모란봉합영회사, 김만유병원 등 10개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합영사업에 참여해 실패한 경험이 있는 재일교포 김선우(가명)씨는 데일리NK와의 통화에서 “합영사업이 경제적 원리가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애국과 충성심만을 자극하여 사업을 벌인 것이 문제”라면서 “초기에는 성과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의 과도한 간섭과 악화되는 북한의 경제 사정 등으로 사업이 어려워졌다”고 밝혔다.


김 씨는 특히 “당시 조총련계 상공인들 사이에서는 경제적 이익보다는 북한 내 가족, 친척들의 지위향상 등을 고려한 부분이 있어 투자라기 보다는 일종의 애국사업, 즉 강제적 ‘헌금’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덧붙였다.(계속)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