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두 차례 회담 성사까지

남북 정상회담은 기나긴 체제경쟁 속에서 실질적인 논의보다는 정치적 공언 수준에 머물다 국제적으로 냉전구조가 붕괴한 문민정부 들어 본격적이고 실질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일찍이 1972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그해 11월 평양을 비밀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여러 차례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촉구하고 자신의 동생 김영주를 특사로 보내겠다는 뜻까지 나타냈다.

그러나 이 부장은 남북간 협조가 잘 이행되고 조건이 성숙됐을 때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당시 북한은 체제안정과 경제성장 면에서 대남 우월감이 있었기 때문에 정상회담에 공세적으로 나올 수 있었고 남한은 상대적으로 수세였다.

이후 남한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남쪽이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역전 현상이 벌어졌고, 우리 정부는 정상회담 촉구를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고 대북 정치공세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1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김일성 주석을 초청하면서 자신의 방북 용의도 밝히는 등 수차례 정상회담을 제의했으나 번번이 북측의 거부에 부닥쳤다.

국내외적으로 냉전체제가 공고한 상황에서 양측이 진지하게 정상회담에 임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2월 취임사에서 김 주석과 정상회담 의지를 밝히고 같은 해 5월 북한의 강성산 정무원(현 내각) 총리가 전화통지문을 통해 특사 교환을 제의하면서 회담 개최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이듬해인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념사에서 정상회담을 거듭 제의했으며 그해 6월 방북하고 돌아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언제 어디서나 조건 없이 빠른 시일내에 만나고 싶다”는 김 주석의 말을 전했다.

남측은 곧바로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제안했고, 남북은 6월28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절차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어 판문점에서 실무대표 접촉(7.1), 통신실무자 접촉(7.7), 경호실무자 접촉(7.8)까지 이뤄져 남북 첫 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남북이 합의한 정상회담 개최일(7.25~27, 평양)을 며칠 앞두고 김 주석이 갑작스레 사망(7.8)하면서 회담은 기약없이 연기됐다.

그러나 북한은 정상회담이 김 주석의 ‘유훈’임을 꾸준히 강조해 여운을 남겼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도 회담 개최에 적극 나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취임 직후부터 꾸준히 특사교환을 통한 정상회담 개최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2000년 3월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북한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정상회담을 위한 첫 남북 특사로 만났다.

두 특사는 같은 해 4월8일 베이징(北京) 접촉에서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합의서에 서명하고 4월10일 남북 정상회담이 6월 평양에서 열린다고 동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5월에는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해 북한 고위인사들을 만나 정상회담을 사전 조율했다.

6.15 정상회담과 공동선언 후 남북 적십자회담, 장관급회담, 국방장관회담, 민족통일축전 등 당국과 민간 행사가 잇달아 열렸으며 남북 교류 규모가 급격히 확대됐다.

국민의 정부는 이런 ‘정상회담 효과’에 힘입어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추진했으나, 미국에서 대북 압박을 주장하는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고 서해교전, 제2차 북핵 위기 발발 등 악재가 겹쳐 2차 정상회담은 계속 미뤄졌다.

참여정부 들어서도 정상회담 개최의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구체적으로 추진되지 못하다가 2005년 6월 방북한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김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정상회담 개최 원칙에 합의하는 등 상당히 깊은 논의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도 당시 정상회담과 관련한 준비를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방코 델타 아시아(BDA) 문제가 불거지면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후 핵실험을 막고 6자회담 복귀를 유도하기 위해 8월 북측에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이 같이 밝히면서 “북측은 상부에 보고하고 답을 주겠다고 했지만 호응이 없어 무산됐다”고 말했다.

이어 10월 북한의 핵실험 사태 속에서 남북관계도 급속히 경색됐다. 이 와중에 노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씨가 10월20일 베이징에서 북한 리호남 참사와 접촉, 비밀리에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진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던 2차 정상회담 논의는 올해 6자회담 2.13합의와 북.미관계 ‘해빙기’에 발맞춰 재개됐다.

이해찬 전 총리 등 범여권 인사들은 8월 이전 정상회담 가능성을 주장했고,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4자 정상회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사자격 방북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정부의 ‘물밑 접촉’이 본격 가동돼, 정부는 지난달 초 김만복 국정원장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간 고위급 접촉을 제안했으며, 북한은 이달초 김 원장의 비밀 방북을 초청, 김 원장의 2차례 방북을 통해 제2차 정상회담이 합의됐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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