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날]”장애인들은 평양에 살 수 없어요”

▲ 황해북도 송림의 의족공장 <사진:ICRC>

“아니, 종성에 갈 놈이 있네.”

북한에서 키 작은 사람한테 농담조로 부르는 말이다. 함경북도 종성은 60~70년대 북한에서 왜소증 장애인들을 집단으로 거주시키기 위해 만든 마을이다. 함경남도 정평군에도 왜소증 장애인들의 집단수용소가 있는데,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난쟁이들이 종자를 퍼뜨리면 안 되기 때문에 한 곳에 모아두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6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자강도 산골에도 왜소증 장애인 수용소가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수용소가 얼마나 더 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북한에서 ‘장애인’은 일반사람들과 지역적으로 완전히 격리된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함경남도 영광군에선 선천적 기형아들을 격리 수용하는 곳도 있다. 왜소증 장애인들은 결혼 자체도 쉽지 않을 뿐더러, 결혼을 해도 ‘불임’을 강요받는다고 한다.

‘혁명의 수도’ 평양에는 장애인들 살지 못해

2003년 입국한 최영숙(가명. 47세) 씨에 따르면 “60~70년대부터 평양을 국제도시로 꾸민다는 이유로 평양에 거주하던 장애인들을 각 지방의 연고지에 따라 강제로 이주시켰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공화국의 수도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평양뿐 아니라 외국인들의 출입이 잦은 다른 대도시에서도 장애인들을 격리, 다른 곳에 수용한다.

평양이 ‘장애인 없는 도시’로 탈바꿈한 것은 80년대 후반. 1989년 ‘제13차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맞아 85~86년 사이 남아 있던 모든 장애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지방에 연고지가 있는 장애인은 부모형제와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지방에 친척이 없는 경우엔 부모도 함께 추방됐고, 간혹 평양에 남는 경우라도 평양의 외곽지역에 거주하며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은둔 생활을 강요당했다.

장애인들 간에도 차별 존재

북한은 ‘선천적 장애인’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통제하지만, 군복무 중에 장애인이 되는 경우에는 ‘영예군인’으로 높은 대우를 해준다. 영예군인의 경우 일부는 평양에서도 살 수 있다. 대부분 평양 만경대구역 ‘영예군인 만년필 공장’에 취직하여 평양의 외곽지역에 거주한다. 하지만 이들도 마음대로 시내 중심가를 돌아다니지 못한다. 지방의 각 시군에도 ‘영예군인 공장’은 있다.

영예군인들만 대우하는 이유는 북한 당국의 계급정책의 일환이다. 또 사회분위기를 ‘준전시 상태’로 유지하여 남한과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와 더불어 ‘군대’를 중시하는 선전효과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9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탈북자 김철기(가명, 2003년 입국) 씨는 “90년대 후반부터 영예군인들이 다니는 직장이 멈추고 배급마저 끊겨, 강도가 되거나 거리를 헤매는 거지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장애인들은 대학에 못 가

현재 북한 당국이 규정하고 있는 장애인의 범주는 지체장애, 청각장애, 시각장애, 정신지체, 정신장애 등 5가지로 분류되어 있다. 농아학교(9년제)와 맹아학교는 있지만 다른 장애인들을 위한 학교는 없다. 장애상태에 따라 의무교육인 소학교와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대학교는 갈 수 없다. 국가정책이 이 정도이니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학력이 낮은 편이다. 북한의 장애인들은 당의 유일사상만을 배우기 위한 최소한의 교육만 주어질 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재활, 직업교육은 꿈도 꿀 수 없다.

북한 당국은 장애인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편의시설에 배치되어 도장 파는 일, 열쇠 깎기, 시계수리 등의 일을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탈북자들은 실제로 장애인들은 단순노동에도 배치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배려가 부족하고 실무 교육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2000년 입국한 김태진 씨는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자기의 정체감을 상실하고 단조로운 일만 하는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며 살아간다”며 “배움의 기회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배우려는 의지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 북한 장애인들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장애인 시설과 의약품 절대부족

전세계 장애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는 <세계밀알연합회>에서는 북한에 휠체어 2백 대를 지원했다. 2003년의 일이다. 그러나 평양 시내에는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시설이 아예 없다. 모든 인도(人道)에는 둔턱이 있다. 병원기관에도 장애인들을 위한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없다. 북한 주민들은 ‘장애인의 이동권’이 무슨 말인지조차 모르고 살고 있다.

북한에도 의족공장이 있다.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영예군인’을 위해 사회주의 국가인 동유럽에서 지원을 받아 공장을 건설해 의족 같은 의료보조기구를 생산했다. 그러나 경제난이 계속되면서 공장은 멈추었다. 황해북도 송림시에 <송림영예군인 교정기구 공장>이 있으나 탈북자들은 ‘대외선전용’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2003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애자 보호법’이 제정됐다. 무상치료제의 혜택(9조), 장애인에게 대학입학 허용(18조), 노동능력 상실 장애인에게 보조금 지급(40조) 등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김태진 씨는 “현재 북한 기업소의 80%가 멈춰있고, 가동되는 기업소에서도 제때 임금을 주지 않는 판에 장애인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북한 당국은 북한의 장애인 숫자를 대략 70만 명으로 발표하고 있다. 1998년 창설된 <조선불구자지원협회>가 1999년 43만 명을 표본조사한 결과를 계산한 숫자이다. 이 단체는 2003년 ‘장애자 보호법’이 제정되자 <조선장애자지원협회>로 개정했다.

현재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와 <핸디캡인터내셔날>(HI) 두 단체에서 함흥과 송림시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ICRC는 2002년부터 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구 생산과 재활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수요에는 턱없이 모자란 형편이다.

강창서 대학생 인턴기자(고려대 북한학과 4학년) kcs@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