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급회담] 남북관계 어디로 가나

제21차 남북장관급회담이 쌀 차관부터 달라는 북측과 2.13합의 이행의 진전이 없이는 제공이 어렵다는 남측 입장이 팽팽히 맞서 아무 성과 없이 끝나면서 남북관계가 흔들리고 있다.

북핵 정세와 맞물려 제 공간을 찾기 힘든 남북관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것으로, 앞으로 북핵 `2.13합의’ 이행의 걸림돌인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자금의 송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남북관계도 겉돌 전망이다.

다만 애초 공동보도문을 내지 못할 것이라는 회담 관계자의 전언과는 달리 막바지 절충을 통해 네 문장 짜리 공동보도문을 극적으로 채택함에 따라 최악의 상황은 피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공동보도문 내용이 공허한데다 차기 회담의 날짜를 잡지 못함에 따라 남북관계의 모멘텀이 이어질 수 있을지를 놓고 관측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2.13합의에 힘입어 대화가 재개되고 지난 5월17일 열차시험운행으로 탄력을 받던 남북관계가 지난해에 이어 쌀 차관 때문에 다시 한 번 경색될 가능성을 점치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 원초적 쌀 공세에 겉돈 회담 = 이번 회담은 원래 의제가 아닌 쌀 차관이 분위기를 좌우했다. 본말이 뒤바뀐 형국인 셈이다.

북측이 쌀 차관 합의의 이행만을 고집함에 따라 이번엔 꼭 `평화정착’ 논의를 본격화하겠다며 전체회의 기조발언을 통해 쏟아낸 평화를 향한 우리측 제안은 공동보도문에 구체적으로 담는데도 사실상 실패했다.

이런 결과는 회담 전부터 예견됐다.

쌀을 실은 첫 배의 출항 시기만 5월말로 맞춘 뒤 나머지 북송작업을 늦추자는 의견이 통일부 쪽에서 제기됐지만 지난 22일 대통령 주재 관계장관회의에서 종전 입장을 유지키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와 6자회담의 속도가 조율돼야 한다는 미국의 속도조율론과 2.13합의 이행을 봐서 쌀을 주겠다는 취지의 약속 등을 감안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작년 7월 미사일 7발을 쏜 지 6일만에 나온 제19차 회담에서도 쌀을 달라고 했던 북측 태도를 감안하면, 작년과는 달리 이미 식량차관합의서까지 체결한 뒤 열린 이번 회담에서 보일 북측 행동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욱이 2.13합의 이행이 지체되고 있는 데 대한 책임이 BDA를 풀지 못한 미국에 있다는 북측의 입장도 `큰소리’를 치게 된 배경이 된 것으로 해석된다.

북측의 이런 태도에는 쌀 차관이 지난 해 제공되지 않았고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한 정부의 대북 옥수수 지원도 최근 2년간 이뤄지지 않으면서 초래된 다급한 식량사정도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개석상에서 밝힌 정부의 정세 판단은 허점을 드러냈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회담 직전인 29일 국무회의에서 `장관급회담에서 쌀 차관이 지연되고 있는데 대해 북측이 항의할 것으로 보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물론 정부의 희망사항에 가까운 전망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안일한 상황 인식은 물론 전략의 부재도 엿볼 수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번 공동보도문은 역대 장관급회담의 공동보도문 가운데 가장 알맹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쌍방은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문제들을 더 연구해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은 우리측이 제기한 평화정착 의제가 녹아들어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아울러 공동보도문을 채택해 파국을 막았다는 점은 다행이라는 평가도 있다.

과거 장관급회담에서 공동보도문을 못 낸 적이 2001년 11월 6차 회담과 작년 7월 19차 회담 등 두 차례 있었는데, 그 직후 각각 5개월과 7개월의 경색기간이 겪은 경험이 반영된 게 아니냐는 관측이다.

◇ 관계경색 우려에 기조변화 주목 = 이런 상황은 향후 남북관계에 대한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전망을 촉발시키고 있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북핵 정세에 종속되는 현상이 굳어지면서 2.13합의 이행의 지체상황을 타개하지 않는 한 남북관계가 동력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한계와 현주소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욱이 BDA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고 북.미 양자를 중심으로 6자회담 참가국 간에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도 비관적 전망의 근거가 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회담 3일째인 5월31일 이례적으로 이뤄진 이재정 장관의 노무현 대통령 면담이다.

이 면담이 북측의 쌀 합의 이행 촉구 때문에 이뤄진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이 장관이 대통령의 재고를 요청하는 자리가 됐을 공산이 크지만 결과적으로 북측이 직접 청와대의 의지를 시험해 보려 했다는 추론까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회담을 계기로 북측 대남전략의 기조변화 가능성을 엿보는 시각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북핵 정세에 연동된 남북관계의 현실을 확인하고 남측보다는 대미 접촉 중심으로 몰고갈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 섞인 관측인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강경한 쌀 요구를 뒤집어 보면 그만큼 남측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만큼 현재로서는 북측이 남북관계를 `낮은 수준’에서라도 계속 유지해 나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한 편이다.

북측으로서는 열차시험운행을 계기로 족쇄가 풀리면서 목전에 다가온 경공업 원자재 협력사업도 포기하기 힘들다는 점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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