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급회담] 北 쌀에 ‘올인’

북한이 남한의 대북 식량차관 지원 유보 결정을 이유로 제21차 장관급회담을 사실상 결렬시킴에 따라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북한이 경의선.동해선 열차시험운행 등 잘 나가던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남측의 식량지원에 집중한 이유로는 우선 북한의 부족한 식량 실태를 꼽을 수 있다.

정부 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전체 식량수요량 650만t중 74%에 해당하는 480만t을 확보해 170만t정도가 부족하다.

북한은 지난 3월 방북한 세계식량계획(WFP) 관계자들에게 식량 100만t이 부족하다고 공개하면서 외부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작년 가을 추수한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는 춘궁기에 돌입하면서 함경북도 회령과 무산, 온성 등 국경지역에서 지난달 1㎏당 800∼850원이던 쌀가격이 900∼950원까지 뛰었고 옥수수도 ㎏당 250∼270원에서 350원까지 치솟았다.

북한의 입장에서 올 가을 추수시기가 돌아올 때까지는 외부 지원이 절실한 셈이다.

더구나 북한은 주민들의 사상이완이 빠르게 전개되는 가운데 올해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주민생활의 향상에 방점을 찍었지만 식량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함에 따라 사회통제도 어렵게 된 것이다.

식량난이라는 실제적 이유 뿐 아니라 북한의 입장에서는 남한의 식량지원 유보 결정이 미국의 요청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파악돼 더욱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는 지난달 23일 “북한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도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주한 미 대사관 측이 장관급회담을 앞두고 외교통상부와 통일부에 쌀 차관 상황에 대해 문의한 것도 우리 정부에 식량지원을 보류할 것을 우회 주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선신보는 “쌀제공 시기와 속도를 2.13합의 이행여부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고 공언한 것은 민족 내부의 상부상조에 스스로 장애를 조성한 것”이라며 “현재의 북남대화와 협력, 교류사업은 2.13합의가 아니라 6.15공동선언에 시발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2001년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한과의 각종 회담 석상에서 ‘민족공조’와 ‘국제공조’ 사이의 양자택일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남북관계는 ‘우리민족끼리’ 이념에 따라 추진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따라서 북한은 이번 회담과정에서 식량지원 문제를 통해 남한에 대해 ‘민족공조’와 ‘외세공조’ 사이에서 택일하라는 압박을 가하고 남한이 응하지 않자 반발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이번 회담에 참가한 북측 대표단을 포함해 북한의 협상파가 쌀문제로 궁지에 몰렸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장성민 전 의원은 중국에 있는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장관급회담에 참가한) 북측 대표가 쌀 차관문제로 북한 내부에서 코너에 몰렸다”며 “(북측 대남관계자들은) 식량사정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쌀 차관을 제공받는 점을 들어 가까스로 철도시험운행에 군사보장을 하도록 군부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북측이 남쪽으로부터 쌀 지원을 받아내는 데 회담 역량을 집중했음에도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지만 남북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성과는 없었지만 회담에서 “쌍방은 6.15 공동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한반도 평화와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문제들을 더 연구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내용의 공동보도문에 합의한 것도 남북관계를 이어가는 여지를 남긴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 관계자는 “작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 열렸지만 쌀과 비료지원 문제가 걸려 성과없이 끝났던 제19차 장관급회담과는 상황이 다르다”며 “식량차관 계약서까지 작성한 상황에서 북한에 식량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2.13합의 이행상황에 맞춰 유보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특히 북한이 당장에 식량을 받지는 못하지만 8천만 달러 상당의 북한 경공업 자재 지원이 예정돼 있고 군사당국간 회담을 통한 평화문제 논의가 기다리고 있는 만큼 북한이 완전히 판을 깨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북 전문가는 “회담이 성과없이 결렬된 것은 이미 정부가 식량지원 유보 방침을 세우면서 예상됐던 일”이라며 “북한이 식량문제 집착한 것도 있겠지만 북한을 회담장으로 견인할 만한 다른 의제나 현안이 없었던 부실한 회담 콘텐츠도 문제”라고 지적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