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본 북한] ①대외관계

※ 6.25전쟁 55주년을 앞두고, 북핵 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 미 우드로 윌슨센터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가 소련과 동구권, 중국 등 과거와 현재의 공산권에서 수집, 분석연구하고 있는 각종 기록 가운데 북한관련 기록을 모은 ’뉴 에비던스(New Evidence)’의 주요내용을 소개한다.

CWIHP의 한반도 담당 캐스린 웨더스비 연구원은 최근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현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사고방식을 분석하기 위해 수십년전 아이젠하워 행정부 기록을 볼 필요는 없지만, 북한은 그동안 김일성(金日成) 부자에 의해서만 통치돼 왔으며, 이들 기록은 놀라울 정도의 부자 정권간 지속성을 보여준다”고 폐쇄사회인 북한의 행태 분석과 예측을 위해 비밀해제된 북한관련 과거 기록을 들여다볼 필요성을 강조했다.

CWIHP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때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소장 한국전쟁 관련 기록 약 200건을 한국측에 넘겨주긴 했으나, 이 문서들은 편집된 것이고 원전은 아니라며, 냉전후 빛을 보기 시작한 북한관련 기록들에 대한 연구가 시작 단계라고 지적했다.

CWIHP가 영역한 과거 북한 관련 원전가운데 오늘의 북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을 ①대외관계 ②대남관계 ③만성 경제난 ④사회상 ⑤공산우방의 대북 인식 ⑥재일교포 북송 6개 주제로 나눠 삽화(揷畵) 형식으로 소개한다.

이 가운데 ’베른트 쉐퍼 논문’과 ’선 즈화(Shen Zhihua) 논문’은 각각 독일과 중국 학자인 두 사람이 동독과 중국의 기록을 바탕으로 쓴 논문을 가리킨다.

김일성-호네커, 중국의 개혁 개방이 가장 두려워

북한 김일성(金日成) 주석은 막역한 친분관계를 맺은 동독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과 3차례 정상회담마다 북한 내부의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는 등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특히 1984년 김일성이 동독을 방문, 2번째 가진 정상회담에선 “중국이 사회주의에서 이탈하는 것이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라고 말해 당시 개방.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중국의 변화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와 관련, 김일성은 “인구 10억인” 중국과 무력충돌 위기가 1969년 있었던 사실도 설명하면서 “우리의 처지 때문에 참아야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80년대 “미국, 일본, 한국의 3각 군사동맹”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도 표출하면서 이를 막기 위한 “대일 협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핵과 미사일 문제를 갖고 세계와 대결함으로써, 중국으로 하여금 한반도 비핵화 원칙에서 때때로 자본주의 국가들 편에 서도록 만들고 있고, 일본에 대해선 미국과 미사일방어체제(MD) 및 확산방지구상(PSI)에 적극 협력토록 만듦으로써 아버지가 가장 경계한 대외관계를 자초한 셈이다.

그러나 우드로 윌슨 센터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의 한반도 담당 캐스린 웨더스비 연구원은 동구권의 각종 외교문서에 나타난 기록을 바탕으로 김일성도 궁극적으론 중국과 소련을 못믿어 체제보장을 위해 독자적 억지력으로 핵무기를 추구했으며 그게 김정일로도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소련, 중국, 동구권 외교문서에서 나타난 북한과 중국의 혈맹관계 이면의 북한의 대중 갈등과 의심ㆍ불신은 최근 핵문제와 관련,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외부에서 보는 만큼 크지 않다는 중국과 미국 일부 전문가들 주장과 상통하는 면도 있다.

◇대중 관계

▲80년대 사회주의 이탈 우려 = (1984년 5월31일 김일성과 호네커간 회담 동독측 속기록. 호네커가 중국 정세에 관해 물은 데 대한 김일성의 답변) 호요방이 5월 북한을 방문했다. 오랜 친구인 등소평이 1982년 4월 나의 70회 생일 때 비공식 방문해 호요방을 신임 당 총서기라며 소개했다. 첫 인상이 좋았다.

호요방은 (1982년 방북 때) 중국은 진정 소련과 관계개선 의사가 있다며 소련 지도부에 전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도 이 점을 재확인했다.

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에게 중국이 전쟁을 원치 않으며, 경제에 대한 문화혁명의 영향을 극복하는 데 모든 자원을 쏟아야 하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대미 관계개선은 소련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이미 모택동과 주은래도 대미 국교수립 때 나에게 말했다. 그들은 일본 및 미국과 만날 때마다 유일한 목적은 발전된 기술과 자금을 빌리기 위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왜 저 중요한 중국 시장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넘겨주나. 중국을 자본주의 국가들에 맡겨두면 중국이 다시 유사 식민지가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중국과 접경하고 있고, 미국 및 일본과 대적하고 있다. 그때문에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것은 중국이 사회주의를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이 계속 사회주의 길을 계속 따르도록 해줘야 한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중국과 경제관계를 발전시키고 중국에 투자도 해야 한다. 내가 소련에 핵발전소 건설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호요방에게 말했더니 호요방은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구입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며 환영했다.

▲60년대 무력충돌 위기 = (같은 속기록. 김일성의 말) 1969년 우수리강에서 중ㆍ소분쟁이 있었을 때, 시골에서 정양하고 있는데 보안성상이 전화로 중국군이 두만강을 도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필요하면 우리 땅에서 (중국군을) 치도록 쏘지 말고 놔두라고 지시하고 우리 군을 파견했다. 그러자 중국군은 철수했다. 중국은 우리를 5년간이나 수정주의라고 비난했으나 우리의 처지 때문에 참아야 했다.

(1977년 12월6일 김일성과 호네커간 회담 동독측 보고서. 김일성의 말) 문화혁명기엔 중국과 관계가 험했다. 북한은 북쪽(중국)과 남쪽 양쪽에 대규모 군대를 배치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문화혁명이 끝난 이래 중국과 관계 개선 노력을 했다.

(베른트 쉐퍼의 논문) 북한은 1961년말 중국의 목표가 북한을 종속국(dependent)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대북 원조의 용처 감시를 위한 위원회 설치를 요구하자 북한 지도부내에 반중 역풍이 일었다.

팽덕회, 김일성 박헌영에게 “당신들은 꿈꾸고 있다”

▲6.25때 김일성과 팽덕회 언쟁 = (선 즈화 논문. 1951년 1월10,11일 대화 기록) 중국의 팽덕회 인민지원군 총사령이 1951년 1월 서울을 재점령한 뒤 1월8일 재정비와 보급을 위해 진격 중지령을 내리자 북한은 극도의 불만을 표시했다.

1월11일 김일성, 박헌영, 팽덕회가 회동, 격론을 벌이다 김일성이 미군은 철수 명분을 찾고 있으므로 밀어붙이면 될 것이라며 신속한 남진을 거듭 요구하자 팽은 “당신들은 꿈꾸고 있다”며 6.25 개전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던 김일성의 오판을 맹성토했다.

“당신은 미국이 결코 파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이 참전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지금 또 미군이 분명히 철수할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철수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귀하는 그저 빨리 이기기만 바랄 뿐 구체적인 준비는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전쟁만 연장시킬 뿐이다. 요행수만 바라며 인민의 운명을 갖고 도박하고 있다. 준비가 되기전엔 단 1개 사단도 남진시킬 수 없다. 내 임무를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내 목을 치고 군법회의에 회부해도 좋고 죽여도 좋다”

▲6.25 때 합동사령부 지휘권 갈등 = (선 즈화 논문) 북ㆍ중관계가 ’입술과 혀의 관계’로 묘사돼 왔으나 실제론 6.25전쟁 중에도 갈등이 고조됐었다. 중국은 대북 지원 용의가 있었으나 북한이 유엔군의 38선 돌파로 어쩔 수 없게 될 때까지 안 받아들이려 한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 4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중국의 지원도 받으라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5월 베이징을 비밀 방문, 남침 계획을 설명했으나 모택동의 북한 접경지 중국군 배치, 무기와 탄약 제공 등의 제의에 사의를 표시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은 6월25일 남침 개시를 중국에 사전 통보하지 않아 중국측은 외신을 통해 알았고, 북한은 중국 대사에게 전황 정보를 차단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중국이 다시 지원을 제안하자 북한은 소련의 재촉을 받고도 한참 후인 9월28일에야 정치국회의를 열어 수용했다.

중국군이 참전한 후에도 북한은 중국과 합동사령부 지휘권을 놓고 과거 중국에 대한 조공국으로서 오랜 역사를 의식, 주권에 대한 우려 때문에 중국측과 갈등을 빚다가 소련의 개입후에야 타결했다.

◇대일 관계

▲나카소네 “미국의 대포밥 안될 것” = (1984년 5월31일 김일성과 호네커간 회담 동독측 속기록. 김일성의 말) 호요방은 일본 방문 결과를 매우 자세히 설명했었다. 나는 중국과 일본간 관계 정상화를 지지한다.

일본에는 군국주의 부활과 미국과의 동맹을 열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일반적으론 경제적 이유로 재무장에 관심이 없다. 일본의 모든 단체는 재무장에 반대한다.

일본에서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달려 있다. 호요방에 따르면 나카소네는 일본이 미국을 위한 대포밥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미국과 헤어질 수는 없겠지만, 종복이 되기를 원치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나카소네가 총리직을 유지하느냐, 아베가 총리가 되느냐가 중요할 수 있다. 중국은 아베가 더 나은 선택안이라고 생각하고 아베에게 접근하고 있다.

일본과 협력해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는 때로 일본 군국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하지만, 어쨌든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미국, 일본, 한국의 3각 군사동맹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측에 20억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중국 경제에 좋은 일이다.

◇대소 관계

▲분단 소련 책임론 = (1959년 9월1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8월20일 헝가리 대사 주최 칵테일 파티에서 이추연(Yi chu-yon) 부총리와 소련 공사간 대화) 이춘연이 남북통일이 언제될 것 같으냐고 묻자 소련 공사는 뜬금없는 질문에 놀란 표정으로 평화통일이 역사적으로 짧은 시일내에 일어날 것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이는 몇년내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전 세계적인 승리 과정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뜻이었다.

우리(헝가리 대사)가 보기에 북한 지도층은 한반도 분단이 소련 때문이므로 통일도 소련 책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소련 공사도 이를 의식해 그런 대답을 한 것이다. 즉 한반도 분단은 (소련 때문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어난 객관적인 역사적 사건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자력갱생은 개인숭배 유지위한 것

▲“소련이 우릴 버릴 때를 대비해야” = (이하는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과 동서 평화공존론 등에 대한 북한의 반발 사례들이다. 1962년 8월27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6월말 타스통신 특파원은 북한의 자력갱생 슬로건 배경에 대해 노동당 관계자가 개인숭배 유지를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우리가 들은 정보로는, 김일성은 3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우리는 소련이 알바니아를 버린 것처럼 우리를 버릴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1963년 5월11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북한 당국은 소련과 동구권 대사관의 전화를 도청하고 우편물 배달을 지연시켰다. 중국 외교관들에겐 채소와 고기를 공급했으나 소련이나 헝가리 외교관들에겐 공급하지 않았다.

(1963년 10월2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소련 대사는 최근 4차례 북한 대학생들이 소련 대사관에 정치망명을 신청했으나 (북한의 공작일 가능성이 있어) 거부했다고 말했다. 한 차례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끌어내기도 했다. 소련 대사는 도발행위라며 북한 당국에 공식 항의를 제기했다.

(1964년 3월1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2월초 후루시초프가 이임하는 북한 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한 말. 북한 주재 소련 대사로부터 들은 내용) 김일성은 남한에 강력한 저항운동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었는가. 그런데 월남과 달리 남한에선 왜 그렇게 조용한가.

(북한 대사가 주한미군의 원자무기에 남한 주민들이 겁먹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현재 한국엔 핵무기가 없다. 서독에 갖다 놨다. 한국에 있다 하더라도 그게 이유가 못된다. 직접 충돌에선 원자무기를 사용못한다. 폭발과 후속 방사능 오염이 자신들에게도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다시 남한을 공격하면,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점은 가망성(probable) 이상이다. (북한측에 대남 평화공존 노선을 택하라고 주문한 것.

보고서는 북한 대사가 흐루시초프의 “다시 남침”이라는 용어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고 특기했다) ▲황장엽 등장 = (1963년 1월7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한 소련 외교관은 황장엽을 포함해 김일성의 “두뇌 집단(brain trust)”을 “정치 게슈타포”라고 불렀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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