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 포근한 삼일포 가족나들이

제16차 남북 이산가족 2회차 상봉 이틀째인 21일 남북 가족들은 오후3시 해금강 삼일포를 찾아 2시간동안 나들이를 즐기면서 혈육의 정을 나눴다.

0…삼일포에 도착한 남측 가족들은 먹거리와 돗자리가 담긴 가방을 받아든 뒤 먼저 와 있던 북측 가족들을 만났다. 가족별로 이곳저곳에 모여앉은 이들은 곧이어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홍인석(84)씨를 57년만에 만난 북측 큰딸 신옥(66)씨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며 ’고향의 봄’을 부르자 주변에서도 하나둘씩 따라불러 잠시 숙연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서로 짧은 얘기를 주고 받으며 한층 가까워지기 시작했는지 서먹했던 첫날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어깨를 걸고 함께 춤을 추기도 했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하던 이들도 지나가는 안내요원과 취재진들에게 스스럼 없이 사진을 부탁했다.

고령의 이산가족들때문에 의료진도 긴장했지만 다행히 별일없이 행사는 마무리됐다.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신고에 의료진이 긴급 출동하기도 했으나, 구금용(93.여)씨의 조카 구영길(46)씨가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누워있는 것이 쓰러진 것으로 오인됐기때문이었다.

0…1950년 전쟁이 발발한 직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 가족을 모두 두고 단신 월남한 이봉근(88) 할아버지는 북측의 쌍둥이 형 태근 할아버지와 만남의 기쁨을 나눴다.

봉근 할아버지는 북측에서 온 조카 명로(65) 인숙(59)씨가 가지고 온 사진으로 가족의 얼굴을 모두 확인할 정도로 기억도 또렷한 상태.

쌍둥이 형제의 남다른 애틋함을 가른 것은 전쟁의 공포였다. 부모가 두 아들중 하나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동생을 남쪽으로 피신시킨 것이 60년가까운 이별의 시작이었다. 30대의 청년은 80대의 노인이 됐고 똑같았던 얼굴도 조금은 달라졌지만, 쌍둥이 형제의 끈끈한 정은 여전한 듯 굳게 잡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0…이종화(81) 할머니는 전날의 어색함을 모두 털어버리고 60년전 헤어졌던 북측 딸과 여동생과 함께 삼일포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가로운 소풍을 즐겼다.

전날 단체상봉에서는 황해도 해주 고향의 기억을 서로 맞춰보고 지난 60년의 세월을 확인했던 이들은 이날 오전 개별상봉 이후 다시 만난 삼일포에서 서로의 건강 걱정에 시간 가는줄 몰랐다.

전쟁 통에 부모와 헤어져 북쪽에서 살아온 딸 최옥수 씨는 몇년 전 허리 디스크 수술을 했다는 어머니의 허리가 내내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어느 병원에서 수술했는지, 어떤 자세가 제일 편한지, 숙소인 해금강 호텔에서의 하룻밤이 불편하지는 않았는지를 연신 어머니에게 물어봤다.

이종화 할머니의 동생 종숙씨도 “나한테는 이제 혈육이라고는 언니 하나뿐인데 건강해야 한다”고 내내 언니의 손을 어루만졌다.

휠체어에 의지해 딸과 동생을 보기 위해 금강산까지 찾아온 이종화 할머니였다. 속초에서부터 이어진 강행군으로 피곤할 법도 하건만 할머니는 “나는 괜찮다”며 딸과 동생을 안심시켰다.

헤어질 때는 5살 꼬맹이였던 딸이 어느덧 65세 할머니가 다 됐다. 전날보다 한결 따뜻해진 날씨로 나들이 하기에 적당히 포근한 삼일포를 바라보며 딸은 어머니에게 삼일포에 얽힌 일화를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했다.

모녀는 세월의 낯설음을 지워버리자마자 헤어질 일이 걱정이었다. 딸은 어머니에게 “이제 내일이면 헤어지게 된다”며 “이렇게 나를 봤으니 이제 내 걱정은 하지 마시고 인차(이내) 다시 만나자”며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졌다.

0…강보에 싸였던 아들은 환갑을 바라보고, 코흘리개 딸의 얼굴에는 아버지만큼 깊은 주름이 패였다. 그러나 57년만에 금강산 삼일포로 첫 가족 나들이를 떠난 이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남측 아버지 고동만(88)씨는 삼일포에 먼저 도착해 있던 아들 정남(59)씨와 딸 춘애(62)씨의 손을 맞잡았다. 정남씨가 북에서 자동차 운전을 한다고 하자 아흔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운전 조심해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버지는 자기만큼 늙어버린 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평남 강서가 고향인 고씨는 전쟁이 터지자 “잠시 피해있으라”는 아버지 말에 부인과 2남2녀를 모두 남겨두고 홀로 서울로 갔으나 인민군의 진격에 떼밀려 대전, 대구, 부산까지 걸어서 피난했다.

이후 고씨는 부산에서 미군 군복을 염색해 시장에 내다파는 일로 생계를 꾸리며 자리를 잡았다. 재혼해 아들 하나를 뒀다.

고씨는 “금강산에 오기전 남측 아들이 ’아버지 혈압이 높으니 절대 울지 마시라’는 당부를 했다”면서도 글썽이는 눈물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는 “95년 상봉 신청을 해 12년 만에 성공한 셈”이라며 “죽기전에 만났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북의 부인과 1남1녀는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0..“형님도 아버지처럼 사람들 웃기는 그런 기질 없수?”
김윤복(85)씨는 1.4후퇴 때 북쪽에 두고 온 동생 정남씨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 때마다 싱긋싱긋 웃음을 연발했다. 57년 만에 만난 형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추억에서부터 손자들 교육 방식까지 주제를 바꿔가면서 우애를 확인했다.

정남씨는 “아버지가 버스간에서 얼마나 사람들을 잘 웃겼는지 몰라”라고 옛추억을 떠올리느라 바빴다.

김책공대를 나왔다는 정남씨는 “월남한 형제들이 다 죽은 줄로만 알았다”면서 “다른 사람들은 사진도 가져왔던데 형님은 왜 안가지고 왔느냐”고 서운해하기도 했다./금강산=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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