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정담<鼎談>] “한·미 관계 약할수록 북한 문제 해결 어려워”

(중앙일보 2006-01-10)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연구하는 미국의 비영리 재단인 아시아재단(한국대표 에드워드 리드)이 10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동아시아공동체 구축을 위한 한국과 미국의 역할’을 주제로 신년 포럼을 연다. 포럼 발표자로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마이클 아머코스트 전 주일 미대사와 스테이플턴 로이 전 주중 미대사를 본사 이홍구 고문이 9일 조선호텔에서 만나 2006년 동아시아와 한반도 정세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 이홍구=지난해 11월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3주 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제1차 동아시아 정상회의(EAS)가 열렸는데, 미국은 이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어요. 이 자리에서 한국.중국.일본은 정례적으로 갖던 정상회담을 열지 못했습니다. 일본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지요. 미국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마이클 아머코스트=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 성공하려면 한국.중국.일본 등 이 지역 핵심 국가들이 확고한 신념과 비전을 공유할 필요가 있어요. 유럽이 통합에 성공한 것도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던 독일과 프랑스 지도자들이 ‘다시는 전쟁을 해선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유럽공동체의 비전을 밀어붙인 결과예요. 그러나 아시아의 경우 아직 공동체의 비전을 모색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어요. 비전은 중요하지만 비전만 갖고는 안 됩니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중요해요. 한국이 프로그램을 내놓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동아시아공동체 논의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기본적으로 태평양 국가이거든요.

▶ 스테이플턴 로이=유럽과 동아시아공동체는 구조적으로 달라요. 우선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이 통합을 주도한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동남아 국가들이 추진하고 있어요. 또 유럽은 독일 통일이 큰 숙제였던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부상이 큰 도전이에요. 나는 동아시아공동체가 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면 지금처럼 미국을 아웃사이더로 두는 것보다 공동체 건설에 참여시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 이홍구=향후 동아시아공동체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 아머코스트=나는 안보.핵확산방지 같은 공공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요.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려면 경제협력뿐 아니라 안보 같은 공공재가 꼭 필요해요. 그런데 지금 아시아 국가들은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자’며 논의만 무성할 뿐 ‘누가 이 지역의 안보를 보장하느냐’ 같은 공공재에 대한 얘기는 통하지 않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얘기가 진행되면 동아시아공동체 논의 자체가 겉돌 수 있어요. 나는 미국이 이런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봐요. 왜냐하면 미국은 지난 50년간 동아시아에 가장 많은 공공재를 투자하고 지금도 안보 시스템을 운영하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려면 일본의 핵무장을 막아야 하는데 이는 미국의 대일(對日) 핵우산 제공을 통해서만 가능해요.

▶ 로이=가장 우려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군비 경쟁이 벌어지는 시나리오예요. 동아시아의 핵심 이슈가 가급적 ‘경제’가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어요. 한.중.일 지도자들은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해 국민을 동원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어요. 미.중 간에 무역수지 등 통상 문제의 불균형이 점차 커지는 추세입니다. 미.중 통상 문제가 자칫 무역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겁니다.

▶ 이홍구=9.11 테러 이후 지난 4~5년간 미국은 이라크.중동.테러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동아시아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어요. 이런 와중에 중국이 급부상했습니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은 시장경제를 통해 평화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봅니다.

▶ 아머코스트=중국은 동아시아공동체와 관련, 두 가지 상반된 전략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고 봐요. 하나는 공동체에 참여해 자신이 아시아의 ‘평화 애호 국가’임을 강조하는 겁니다. 동시에 베이징(北京)은 이 공동체를 활용해 자신을 동아시아의 패권국가로 자리매김할 공산이 커요. 특히 미국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한국.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어요. 이 심리적 틈새를 중국이 파고들 겁니다.

▶ 로이=중국의 급부상으로 세계경제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동했어요. 구매력을 기준으로 할 때 중국은 이미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에요. 중국 경제의 성장은 내부적으로 중국인들을 세계화하고 있습니다. 긍정적 측면이 강해요.

▶ 이홍구=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 아머코스트=현재 일본은 ‘보통 국가’를 추구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일본이 하려는 것은 국제적 평화유지활동 같은 겁니다. 미국 입장에서 일본의 이 같은 목표는 용납할 만하다고 봐요. 이 문제에 대한 한국.중국 같은 주변국의 시각은 부정적이지만요. 최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한국.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무릅쓰고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나는 이것이 인기를 노린 고이즈미의 국내용 제스처라고 봅니다. 아시아에서 고립된 일본은 미국에도 좋지 않아요. 역사적으로 일본은 항상 한 발은 서구에, 또 다른 한 발은 아시아에 걸친 ‘양다리’국가예요.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 같은 문제는 이 두 가지 문제가 중첩된 이슈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는 거죠.

▶ 로이=전문가들은 중국과 일본의 경제개발 모델에 큰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어요. 일본의 경제개발 모델은 국내 자본을 동원해 국제경쟁력이 있는 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반면 중국은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해 외국 기업의 생산기지가 됨으로써 수출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어요. 일본은 동아시아에 엄청난 경제 원조를 했지만 이렇다 할 만한 이득을 얻지 못했어요. 반면 중국은 주변국에 중국에 투자할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큰 기회를 제공하고 있어요. 중국은 경제적 카드를 활용해 정치적 영향력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 이홍구=북한 핵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 아머코스트=최근 북한 위조지폐 문제 등으로 핵 문제 해결 전망이 다소 어두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워싱턴과 베이징 모두 ‘북한 핵이 폐기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해관계가 일치해요. 그런 뜻에서 미.중 협력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생각해요.

▶ 로이=한국 정부는 북한 핵 문제를 풀기 위해 한.미 동맹을 한층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자는 한.미 관계가 소원해지면 남북 관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보는데 이는 오산이에요. 한.미 관계가 약할수록 북한 문제가 긍정적으로 풀릴 가능성은 작아요. 서울이 워싱턴에 대해 큰 지렛대를 가질수록 핵 문제를 풀기 쉬워질 겁니다.

▶ 이홍구=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참석자>

마이클 아머코스트 전 주일 미대사

24년 동안 미 국무부.국방부.국가안보회의(NSC) 고위 관료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 결정에 참여해 왔다. 1972년 주일 미국대사 특별 보좌관에 임명되면서 아시아와 인연을 맺었다.

82~84년 주필리핀 대사를 지내며 필리핀의 민주화를 측면에서 지원했으며 89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지명으로 4년간 주일 대사를 지냈다. 이후 95년부터 7년간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2002년부터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미 컬럼비아대에서 공법과 행정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테이플턴 로이 전 주중 미대사

워싱턴의 대표적인 동아시아통. 45년간 중국.홍콩.대만.싱가포르.태국.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근무했다. 부모가 중국에서 미국 선교사로 활동할 때 난징(南京)에서 태어났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러시아어와 몽골어도 구사한다. 냉전 시절 모스크바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싱가포르(1984~86년).중국(91~95년).인도네시아(96~99년) 대사를 지냈으며 국무부 정보 분석 및 연구 담당 차관보를 끝으로 2001년 퇴직했다. 2001년부터 국제정치 컨설팅 회사인 키신저 어소시에이츠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56년 프린스턴대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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