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한 남파간첩의 실존에 대한 물음

“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느 샌가 긴장도 감각도 무뎌진 채 그저 하루하루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야말로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고 있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국내 문단의 젊은 리더 김영하(38)씨가 세 번째 장편소설 ’빛의 제국’(문학동네)을 냈다. ’검은 꽃’(2003) 이후 3년 만이다.

젊은 감각, 빠른 전개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그가 이번에 내놓은 소설의 주인공은 22세였던 1984년 서울로 남파돼 20여 년을 생활한 40대 간첩 ’김기영’이다.

“개인용 컴퓨터라는 게 없던 시절에 내려와서 남한 사람들과 함께 그 신기한 발명품에 놀라며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갔”던 기영은 당의 명령에 따라 대학 입시를 치렀다. “잘 훈련된 공작원을 아예 신입생으로 집어넣어 학생운동의 인자들과 함께 커나가도록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189쪽)

대학 졸업 후에는 영화 수입업을 하며 남파된 스파이들을 각지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포스트’ 역할을 했다.

1995년 자신을 내려보낸 북측 담당자가 실각한뒤 스파이로서 10년 간 어떤 명령도 받지 않은채 평범하게 살아가던 기영은 2005년 어느 날 “모든 것을 청산하고 즉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소설은 이날 오전 7시에 시작해 다음날 아침 같은 시간까지, 단 하루를 다룬다.

긴박함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귀환을 결정해야 하는 기영의 갈등이 이어지고 그가 대학시절 만난 아내와 중학교에 다니는 딸의 일상이 펼쳐진다.

주인공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스파이지만 작품 속에는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곳곳에 ’보편적 한 인간의 이야기’로 읽히는 글들이 많이 나온다.

대학 후배가 기영에게 하는 말도 그렇다. “아주 오래, 십 년 혹은 심지어 이십 년씩 장기 공연하는 연극들 있잖아. 형은 그런 연극에 너무 오래 출연해서 자기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린 사람 같아. 낮에는 어떻게 살든지 간에, 밤에는 그 배역으로 사는 사람.”(290쪽)

“히레사케와 초밥, 하이네켄 맥주와 샘 페킨파나 빔 벤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인간”, “일요일 오전엔 해물 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앞 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인 기영의 모습도 그리 낯설지는 않다.

작가는 이번 소설을 구상할 때 시인 폴 발레리의 시구 가운데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문장이 떠올랐다고 한다. 기영에게도 해당되지만 ’보편적 한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문장이 아닐까.

책 표지로는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 쓰였다. 그림 속 하늘은 낮처럼 밝은데 나무들은 밤인 것처럼 어둡고 가스등에는 불이 켜져 있다. 낮과 밤 두 세계가 함께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혼자만 어둠 속인 혹은 혼자만 대낮인, 그런 세상”이라고 한다.

그는 “이 소설의 기본적 지향점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그리고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라면서 “그것을 통해 한치 앞을 모르는 눈 먼 인간들의 운명을 다루고 싶었다”고 밝혔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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