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부 최우수상] 초면의 만남에서 마주한 북한의 현실

초면의 만남에서 마주한 북한의 현실

신보라 (명지대 07)

떨린다. 하겠다고 덥석 시작하긴 했지만 잘 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생경한 그들을 만나 깊숙한 사연들을 들추는 것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일이었다.

대학생 명찰을 단 이후 탈북 대학생들과 만남을 갖기도 하고, 자원봉사 활동에도 참여하며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내게 어느 날 아르바이트 제안이 왔다. 한 단체에서 북한인권 실태조사를 진행하는데 이와 관련한 탈북자 설문조사에 함께 동참해 달라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했고, 북한인권문제에 문외한 일반 설문조사 인력이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내가 하는 편이 낫겠다는 위안을 가지며, 하겠다고 결정했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들의 가슴 아픈 사연 이야기를, 차마 잊고 살고 싶을 그들의 지난 과거를 초면의 만남에서 이야기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왠지 상처가 될 것만 같았다. 걱정이 되면서도, 그들의 이야기가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자극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나의 초면의 만남을 시작했다.

첫 만남. 사는 집에서 이곳까지 족히 한 시간이 넘는 거리기에,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가까스로 약속시간에 맞춰 미금역에 당도했다. 미금역 부근에는 많은 탈북자들이 산다고 했다. 전부 임대아파트다. 서울 외곽에는 탈북자들을 집단으로 거주하는 임대아파트들이 많다. 방화, 가양동, 수서 부근 등에도 수많은 탈북자들이 모여 산다.

벨을 누르자 배가 산만한 한 여성이 고개를 내민다. 한눈에도 어려 보였다. 안방 정면에 걸려 있는 웨딩 사진. 하나원에 살면서 지금의 남편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다는 그녀는 나보다 어렸지만 벌써 두 아이를 가진 어엿한 여성이었다. 변변찮은 책상이나 식탁이 없어 우린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나가야 할 지 설명이 필요했다. 무턱대고 어디서 왔느냐, 언제 탈북을 결심했느냐,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서로 멋쩍은 눈빛을 교환하다 우리의 대화는 시작됐다.

함경북도 무산에 살다 중국과 태국으로 거쳐 한국으로 왔다는 그녀의 아버지는 무산의 광부였다. 1990년대 후반의 식량난을 어릴 때 겪으면서 영양실조를 심하게 앓았다는 그녀는 그래서인지 한국에 와 임신을 했음에도 몸이 홀쭉하기만 했다. 다행히 아버지가 무산 광산에서 일을 하셔서 공급소에서 돈을 주고 조금의 식량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영양가 없는 옥수수 강냉이였다.

그녀는 북한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참 싫은 듯 했다. 특히 2000년대가 되어서도 식량난이 쉬이 가시지 않아 어떤 가족은, 엄마가 자식들을 먹여 살리지 못하고 빚도 지게 돼서 모두에게 쥐약을 먹이고 함께 죽었다며, 북한은 “생지옥”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엄마, 아빠를 떠나 홀로 북한을 탈출하며 외로운 타국 살이를 해야 했던 그녀. 다행히 하나원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한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지만, 그녀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한국에 홀로 남아있다는 외로움에 많이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나마 아이와 남편이 자신을 굳세게 만들어 주고 있다면서 말이다. 조촐한 임대아파트에서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갖추고 사는 그녀에게 힘내라는 말을 건네며, 스무 살 남짓한 그녀가 겪었을 북한과 타국에서의 20년을 과연 온전히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며칠 뒤, 한 탈북 대학생과의 만남은 어렵게 성사됐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했다는 그는 산업디자인 계열에 실력으로 당당히 합격했다며, 이것저것 준비로 정신없어 했다. 20대 후반에 열정 넘치는 그의 모습에서 외롭고 힘든 탈북자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전해들은 북한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 그 이상이었다.

2006년에 탈북 한 그에게는 아홉 번의 탈북과 ‘교화소’(북한의 수용소) 생활을 경험했다는 믿기지 않은 전력이 있다. 어딜 가든 방랑자나 꽃제비, 굶어죽는 사람이 허다하던 고난의 행군 시기, 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중국으로 장사를 하러 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탈북을 시도했던 그는, 그때부터 탈북 하겠다는 주변 친구들과 함께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덜미를 잡혀, 교화소에 수감된 그에게 수감생활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보위부는 비법 월경한 그에게 ‘인신매매’라는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씌워 수용소에 수감한 뒤, 끊임없이 자백을 강요하며 고문을 했다. 하루 종일 노동을 강요당하고, 일을 제대로 안 할 경우에는 삽으로 맞거나 발로 짓밟히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했다. 무조건 앉아 있게 하는 고문을 시키면서 움직이기만 하면 때리는 통에 한국에 와서도 그는 만성 관절염에 시달려야 했다.

관절염은 끊임없이 그가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는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고, 자기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한국이 좋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북한의 인권 침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북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권이 침해받으면서도 그것이 인권 침해인지, 인권 침해가 아닌 지 잘 몰라요. 인권의 개념 자체를 모른다는 게 가장 큰 인권 침해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그렇다. 북한 주민들은 ‘인권’이라는 말 자체를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나라에 비해 얼마나 인권 유린을 당하고 있는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피폐한 지도 모르면서 지내는 것이다. 외부와의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며, 이곳이 지상낙원이며 우리가 가난을 겪는 것은 모두 미제 때문이라고 선전하는 북한이기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이제는 탈북자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아무리 가로막으려 해도 북한으로 유입되는 외부 정보로 인해 달라지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의식도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난 분은 북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겐 생소할 수 있다. 바로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주됐던 ‘북송재일교포’다. 북송재일교포는 1960년대 일본의 조총련계가 북한 정부와 함께 선동해 북한으로 이주하게끔 해서, 북한에 살게 된 교포들을 말한다. 당시 조총련 간부였던 둘째 형의 입발림 끝에 북한행 선박을 탔던 그는 “그때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든 북한은 가지 않았을 거요”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북한에 가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배부르게 공부하고,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받게 된다는 믿음은 북한에 도착한 순간부터 어김없이 깨지고 말았다. 말도 함부로 할 수 없고, 이동의 자유도 없고, 말만 잘못하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던 생활. 일본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을 이미 경험한 그로서는 당국의 통제나 터무니없는 선전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일본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아예 금지됐고, 편지 교환과 송금만 가능했는데, 이마저도 편지는 검열당하고, 돈은 중간에서 가로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북한 당국이 북송재일교포를 중간동요계층으로 분류하며 모든 자유를 구속하는 것에 불만을 터뜨리다, 한국으로 먼저 간 사위가 보낸 브로커를 통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 가족들이 남아있지만 일본보다는 조국인 한국의 품이 그리웠다는 그는 생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는 것이 좋다며, 북한행을 택했던 그의 선택이 인생의 가장 큰 후회라고 소회했다. 자신의 체제를 지상낙원으로 선전하기 위해 재일교포를 희생양으로 삼은 북한. 북한 체제는 그렇게 잔인한 곳이었다.

세 차례의 만남, 그리고 북한을 살아온 세 분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오롯이 북한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기아와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인민,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는 인민, 지옥의 북한을 탈출하기 위해 고생하는 인민. 이 모두는 바로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누리게 하지 않는 북한정권의 독재와 기만이 부른 모습이었다. 그 속에서 평생의 몇 십 여년을 살아가야 했던 이들의 탈출과 이들의 용기 있는 발언으로 북한의 인권유린과 참상은 이제 세계 곳곳에 알려 지고 있다.

초면의 만남에서, 그 분들이 생경한 내게 가슴 시린 이야기를 해줄까, 나는 과연 얼마나 공감하며 가슴 아파하며 들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탈북자들은 그들의 기억을 말하기 주저하면서도 “내 말 한마디가 고향 사람들의 인권 개선에 도움을 줄 단초를 마련할 수 있으면 되지요”라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탈북자들은 닫혀 있는 북한의 진실과 피폐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며, 지금도 아픈 현재를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의 희망이 되어주고 있다. 북한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

어느덧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가 1만 5천여 명에 가까워졌고, 정보가 차단됐던 북한 사회의 진실도 속속 밝혀지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사람들의 북한에 대한 관심은 냉담하기만 하다.

북한에 대한 싸늘한 시선은 주변에서도 느껴진다. 어느 나라나 어느 정도의 인권문제는 있는 거 아니냐며 북한의 인권유린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친구나,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내게 “내정간섭이지 않을까” 하며 걱정하듯 말하던 친구들.

아마도 북한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마주한 적이 없고, 북한의 인권유린 문제가 많이 알려지긴 했어도 관심이 적으면 그만큼 보이지 않기에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북한 주민들에 대해 남한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점이 내 친구들과 비슷할 것이라는 점이다. 슬픈지만 혹독한 현실이다.

한 탈북자는 “굶주림보다 무서운 것은 희망을 버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굶주림을 이겨내며 희망을 찾아 시린 강을 건너, 산을 넘고, 숲을 헤치는 수많은 탈북자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온전히 희망과 자유를 찾게 될 날은 언제일까. 아직은 요원해 보이지만, 우리의 관심은 작지만 큰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처음 세 분의 탈북자를 만날 땐, 그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추는 것이 괜찮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떨렸다. 하지만, 세 분을 만난 지금, 나는 그들의 희망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린다. 부디 탈북자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가슴 떨리는 일에 더 많은 이들이 함께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