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 60년]②왜 ‘노동당’으로 이름지었나

북한은 왜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와 달리 ‘공산당’이 아니라 ‘노동당’을 당명으로 삼았을까.

북한이 조선노동당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는 1945년 10월10일은 ‘조선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된 날이다.

조선공산당은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된 이후 일제의 계속된 탄압으로 박헌영의 ‘서울콤그룹’만 지하조직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해방과 함께 재건됐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그해 4월 ‘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을 변경한 데 이어 8월에는 중국 연안파(延安派)가 중심이 된 조선신민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이 탄생했다.

남측의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 두 노동당은 1946년 6월 통합돼 조선노동당으로 거듭났다.

북조선공산당은 1946년 8월28일 신민당과 합당 당시 노동자, 농민은 물론 근로인텔리 등 각계 각층을 아우르는 동시에 이전 사회주의 계열의 당파성.이합집산의 이미지를 떨쳐 버리려 애썼다.

조선노동당출판사의 ‘김일성전집 4권'(1992)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6년 8월29일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당시 ‘근로대중의 통일적 당의 창건을 위하여’라는 보고에서 “두 당의 합동(합당)은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의 광범위한 대중을 튼튼히 결속시키는 데 있어 커다란 전진”이라고 평가했다.

또 “근로대중이 분열되는 것은 최대의 위험”이라며 “근로대중의 통일적인 참모부, 근로인민의 유일한 전투적 선봉대를 꾸리는 문제는 오직 노동당을 창립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 주석은 같은 날 ‘노동당의 당면과업에 대하여’라는 연설에서도 “노동당은 어디까지나 맑스-레닌주의를 지도이론으로 삼을 것”이라고 못박은 뒤 “우리는 좌.우경적 경향과 무자비하게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주석은 ‘인텔리당’으로 불릴 정도로 지식인과 유산계급이 주축이 된 신민당과 합당을 통해 노동자.농민뿐 아니라 각계 각층을 포괄, 더욱 확고한 지지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조선전사 23권'(1981)도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여러 정당들의 통합은 절실한 문제였다”며 “공산당이 좁은 계급적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근로자당과 합당해 광범위한 근로대중을 묶어 세울 수 있는 대중적 당으로 발전하는 것은 당시 조성된 정세와 당 및 혁명 발전의 합법칙적 요구였다”고 설명했다.

북조선공산당의 ‘끌어안기 전략’은 한반도 북쪽에서 친소련파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소련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졌다.

이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서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주석단 귀빈으로 대회를 지켜보던 소련의 이그나치예프 대령은 “김일성 동무를 추대하는 것이 정해진 사실이다”라는 공산당측 간부의 말에 신민당 대표단이 술렁이는 것을 보고 즉각 의장단에 ‘휴회 쪽지’를 보냈다.

그는 이어 양당 지도부를 불러 “위원장이 반드시 김일성이어야 한다는 철칙은 없다”는 것을 속개 본회의에서 발표하도록 지시해 신민당측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세심함’까지 보였다.(김창순 저 ‘북한 15년사’, 1961)

1948년 공산당원(약 27만명)이 신민당원(9만명)보다 절대 우세에 있었음에도 위원장직을 신민당 당수인 김두봉에게 양보한 배경에는 지지기반 확대와 안정이라는 김 주석과 소련의 의도가 있었던 셈이다.

이항구 통일연구회장은 “북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보다 폭넓은 사회계층을 지지세력으로 망라하기 위해 신민당과 합당을 적극 추진하고 당명까지 바꿨다”며 “공산당과 노동당의 본질적인 성격은 같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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