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60년 특집④] ‘北 정통성’ 부여, 보천보 전투는 과장됐다

▲ 보천보 전투를 지도한 김일성<출처:야후>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가 있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주도의 ‘동북항일연군’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보천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의 조선국내 진공작전의 일환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인 주보중이 이끈 부대의 제6사장이었다.

북한에서는 ‘보천보 전투’를 지난 50여년 동안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중요한 선전자료로 이용해왔다.

북한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서강(西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하였다.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환영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이 교시했다는 연설문도 싣고 있다.

그러나 교과서를 유심히 읽어보면 이상한 구석이 발견된다. 몇 명의 전투원이 참가하고 몇 명을 사살했다는 등 구체적인 전과(戰果)에 대해서는 일절 설명이 없다. 다만 보천보 전투를 통해 “조선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할 것을 외쳤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는 ‘주장’만 있다.

‘보천보 전투’는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혁명 역사를 선전하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데 왜 교과서에는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지 않았을까.

우선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등 관련자료를 통한 보천보 전투의 전개과정을 보자.

당시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중국 공산당 만주성당 특위서기 위중민의 신(新)방침에 근거해 1936년 3월 서강 양목정자(西崗楊木頂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조선 국내진공 작전’이 논의됐다. 이 회의는 주보중 부대의 제4사(師長 주수동)와 제6사(師長 김일성)의 공동작전에 제2사(조아범)를 가담시키는 문제를 논의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 ‘연설하는 김일성’ 그러나 증인은 없다.

3명의 사장 중 조선인으로는 김일성밖에 없었다. 이 회의에서 제6사는 보천보를 공격하고 제4사는 무산을, 제2사는 장백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김일성이 공격하기로 한 보천보는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오는 가림천가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시골이지만 조선의 내륙으로 통하는 중요한 철도 분기점인 혜산진과 만주 장백현의 중심인 장백부를 가까이 접한 요충지였다.

보천보는 게릴라 부대에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심리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습격 대상이었다.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90여명을 인솔하여 보천보를 습격했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등 뒤로 피하던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김일성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의사, 요리점, 잡화상 등 10여개의 점포와 주택에 침입하여 현금과 물자를 탈취했다. 이에 반항하던 일본인 요리점 주인이 살해됐다.

▲ 당시 상황을 보도한 동아일보

이들은 철수하기 전에 ‘한인조국광복회 목전 10대 강령’ 50장, ‘일본군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병사들에게 고함’ 수 십장, ‘반일대중에게 격함’ 수 십장, ‘포고문’ 6장의 빠라를 살포했다고 주장한다. 삐라에는 ‘북조선 파견대’라고 씌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자료들이 발견되거나 전시된 것은 없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더미 옆의 달구지 위에서 환영 나온 보천보의 수 백명 인민들 앞에서 기막힌 연설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연설을 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았다.

보천보 전투는 전과로 치면 미미한 전투였다. 적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 전과라면 전과지만 2명의 민간인도 희생됐다. 북한 교과서가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가 연일 보도하면서 많이 알려졌다. 당시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일시 폐간됐다 복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실제 발생한 ‘보천보 사건’은 ‘사건 기사’로 비교적 크게 다룰 수 있었다.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투쟁을 한 것은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보다 엄청나게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는 것이 북한이 선전하는 김일성 항일혁명역사의 실체다.

김일성도 생전에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을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 한 것보다는 나은데, 왜 (사람들이)우리를 깎아내리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술회한 바 있다(황장엽 증언).

김일성이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항일무장 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전과는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문제는 미미한 활동을 과장, 왜곡, 날조하여 해방 후 60년 동안 항일무장투쟁에 정권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이를 발판으로 아들에게까지 정권을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김정일은 80년대부터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을 묶어 ‘백두산 3대장군’으로 날조하고 있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
강창서 대학생 인턴기자 kcs@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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