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일반부 최우수상] 그늘도 그늘 나름



그늘도 그늘 나름


홍경석


나는 올해 54세의 무지렁이다. 평생을 비정규직의 세일즈맨이란 변방과 음습한 그늘만을 점철했다. 그러다가 올부터 어찌어찌 매달 월급이 또박또박 나오는 직장에 취업했다. 그러나 직종이 경비원이다 보니 박봉인 건 여전하다. 하지만 과거완 사뭇 달리 매일매일 판매실적에 쫓기는 생활에서 탈피하고 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지덕지하다. 물론 하루 건너 만나게 되는 야근의 묵직한 피로감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불운하고 박복하기까지 하여 국민(초등)학교도 겨우 마치곤 소년가장이 되었다. 소위 ‘가방끈’이 그처럼 ‘짧다보니’ 평생을 힘없는 을(乙)의 입장에서, 또한 각종의 불이익 따위를 무수한 소나기로 맞으며 살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내 나이 지천명이 되던 해에 뜻한 바 있어 3년 과정의 사이버 대학인 <전태일 노동대학>에 입학해 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주지하듯 전태일은 초등학교조차 못 나오곤 평화시장에서태일의 그처럼 숭고한 희생은 오늘날 한국의 노동현장에 그나마 밝은 햇살을 비추게 한 미싱사로 이 풍진 세상사와 조우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그는 힘없는 노동자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날을 학수고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자 격분하여 마침내 분신한다. 전태일 노동대학에 들어가기 전의 나는 청맹과니도 그런 청맹과니가 따로 없었다. 그건 늘 그렇게 처자식하고 먹고살기에도 바쁜 나머지 만날 가량이가 찢어진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어쨌든 비로소 접하게 된 그 대학에서의 만학(晩學)은 무지몽매한 이 필부에게도 새로운 지식의 보고로 다가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대학에서 나는 참 많은 걸 배웠다.



그 중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사람은 노력 여하에 따라 신분까지를 능히 타파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세 봉건사회엔 신분이 타고나는 시대였다. 하여 제 아무리 날고뛰는 재주가 있다손 쳐도 일단 신분이 낮은 경우엔 도무지 출세를 할 수 없었다. 이같은 패러다임의 적용은 우리의 조선시대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어떤 불세출의 남아일지라도 일단 신분이 서자(庶子)와 상놈이라고 하면 그 낮은 신분으로 말미암아 관직에 나갈 수 없었음은 이같은 주장의 뚜렷한 반증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어 지금은 학력 아니라 그 어떤 장애적 요소가 있을지라도 자신만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성공하는 시대로 변화되었다.



이처럼 과거로 치면 평민이 노돗돌을 딛고 성공의 관문까지를 여는 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어떤 장점이라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 심화와 부자와 재벌의 부(富)의 세습(世習)이란 고질병은 여전히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까지 회자되고 비판까지를 받는 즈음이지만. ‘세습’은 한 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을 일컫는다. 과거 왕조시대엔 이러한 따위가 크게 흉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명천지’의 21세기이다. 그러함에 케케묵은 과거를 여전히 답습하는, 특히나 정권의 세습은 곧바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23년간이나 독재를 해오던 튀니지의 알리 정권에 반대해 2010 12 시작된 튀니지의 민주화 혁명을 일컫는 ‘재스민혁명(jasmine Revolution)’ 시위의 발단이 실은 ’사소했다‘. 지난 2010 12 남동부 지방도시인 시디 부지드 거리에서 무허가 노점상을 하던 청년의 죽음에서 시작된 것인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 노점상을 하던 20 청년이 경찰의 단속에 항의해 분신자살을 했다. 그러자 이러한 사연은 곧장 청년층의 분노를 촉발시켰는데 여기에 극심한 생활고와 장기집권으로 인한 억압통치와 집권층의 부정부패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로 확산됐다. 결국 지네 엘아비디네 알리 당시 튀니지 대통령은 2011 1 14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지 않으면 정도로 사태는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 튀니지 혁명은 아프리카 및 아랍권에서 쿠데타가 아닌 민중봉기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첫 사례가 되었다. 또한 인근의 이집트를 비롯해 알제리와 예멘, 요르단과 시리아를 넘어 이라크와 쿠웨이트 등 독재정권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및 아랍국가로까지 민주시위가 점차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한데 왜 유독 그렇게 북한은 여전히 철권정치가 요지부동이고 또한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이 여전한 걸일까? 북한에서는 지난 1990년대 중반에 무려 수백만 명이 아사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정권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주석궁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조해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하면서 8억 9천만 달러의 돈을 사용했다. 그 돈이면 북한 전역의 주민들에게 3년간 옥수수를 공급할 수 있는 엄청난 액수였는데 말이다. 과거 왕조시대에도 국민, 즉 백성이 배를 곯으면 반성과 회개의 뜻으로 임금과 왕은 기우제를 지냈는가 하면 아주 허술한 반찬만으로 수랏상을 받았음은 상식이다.



그러니까 북한정권은 한 마디로 국민은 도통 안중에 없는, 그야말로 발톱의 때로도 안 여기고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아들보다도 나이가 적은 ’아이‘가 김정일의 후계자로 옹립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던 날 솔직히 시쳇말로 ’쪽 팔려서’ 죽을 뻔 했다. 그건 따지고 보면 여전히 같은 백의민족 차원에서의 정서였으며, 동시에 그같이 웃지못할 난센스를 다른 국가의 국민들이 보면서 얼마나 비웃었을까 라는 괜스런 자격지심이 발동한 때문이었음은 구태여 사족이다. 평소 모 방송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시청한다. ‘탈북 미녀들의 이야기’라는 이 방송을 보자면 여전히 모든 부문에서 격차가 너무도 심한 북한의 실상을 능히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방송에서의 잇따른 ‘증언’에서도 드러나지만 북한의 오늘날은 예나 지금이나 역시도 그 나물에 그 밥의 고루함과 진부함, 그리고 전형적 봉건주의의 폐쇄에 다름 아니다. 최근 일독한 [남한의 지하혁명조직과 북한 – 진보의 그늘]이란 책을 접한 건 나름의 커다란 수확이란 느낌이었다. 왜냐면 그동안 솔직히 추상적으로만 알았던 ‘남한의 지하혁명조직과 북한’이란 실체를 이 책을 통하여 비로소 천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책의 저자 한기홍은 나와 나이가 얼추 비슷한 1961년생이다. 또한 연세대에 입학하여서는 학생운동에 투신하였다는 어떤 공감의 정서가 균등하다는 공통점이 발견돼 더욱 교감이 가는 듯 했다. 물론 당시에 나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넥타이 부대’의 열혈시민으로써 ‘6월 항쟁’의 후면에 나섰다는 점이 그와 다르긴 하지만. 어제는 통합진보당의 ‘5·12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 당시 조준호 전 공동대표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일명 ‘머리끄덩이녀’로 불려온 20대 여성의 신원이 보름여 만에 확인됐다는 것이 톱뉴스로 보도되어 관심을 끌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이 여성이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여주.이천지역위원회 소속 회계 담당자인 박모 씨(24)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래서 느낀 솔직한 심정은 내 딸아이보다도 어린 게 ‘싸가지 없이’ 명색이 대표나 되는 인사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부분에 활화산과도 같은 분노함이 집약되었다. 그 ‘머리끄덩이녀’가 더욱 얄미웠던 건 솔직함마저 저버린 작태가 더욱 괘씸했다는 사실이다.



언필칭 진보(進步)적 운동권이라 자칭하며 행동까지 했을 통합진보당의 소속 회계 담당자이자 당원일 그녀였다면 최소한 진즉에 언론에 나섰어야 마땅했다. 그리곤 “내가 그 문제의 ‘머리끄덩이녀’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사과드립니다!”라고 했어야 도리이며, 또한 그리 했다면 이토록이나 사회적 파장이 커지진 않았으리라. 하여간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의 본질과 핵심은 기실 따로 있다. 자칭 사회적 변혁을 꿈꾸며 행동했다고 자처하고 자부했을,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몫의 국회의원이 된 이석기와 김재연 의원을 보는 시각이 바로 그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없어도 우뚝한 자존심만큼은 견지해야 옳다는 것이 평소의 사상이자 신념이다. 한데 이 두 사람은, 특히나 이석기의 경우는 저잣거리의 장삼이사도 중시하는 체면조차도 죄 내던졌다는 게 개인적 시각이다.



국회의원이란 자리가 그토록이나 좋단 말이던가! 아무튼 여론이 더욱 악화되자 급기야 통합진보당은 6월 3일 현재, 서울시 당 당기위 2차 회의를 열고 이들 의원에 대한 징계 심사를 벌인다고 했다. 고로 이들 후안무치한 의원들에 대한 향후 조치와 신상의 변동은 두고 볼 일이다. 어쨌거나 [진보의 그늘]을 읽자니 이 책의 33~70페이지에도 등장하는 <민족민주혁명당, 민혁당 사건>의 주인공인 이른바 ‘주사파’의 원조(元祖)인 김영환 씨가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에서 중국 당국에 체포된 지 두 달이 넘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의 거울로 반사되었다. 그는 과거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만들었다가 해체시킨 뒤 북한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해오던 인물이다. ‘북한 인권운동가’로 알려진 김영환 씨는 북한의 명실상부 원조국(援助國)인 중국에 의해 국가안전위해죄(危害國家安全罪)를 범한 것으로 우리 정부 당국에 통보되었다고 한다. 이같은 현실에서도 보듯 김 씨의 중국 당국에 의한 강제구금은 사실상 북한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진보의 그늘] 자세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등장하듯 김영환 씨는 1982 서울대에 입학하여 198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 민족해방(NL) 계열의 주체사상 이론가였다. 그가 작성한 <강철서신> 대학가 주체사상의 교범으로 알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1991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황장엽 노동당 비서를 만난 비로소 북한의 허울 뿐인 주체사상에 회의를 갖게 된다. 이후 1990년대 중반부터 ‘뉴라이트’로 전향해 북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그는 그러니까 북한의 입장에서는 변절자이자 배신자까지 되는 셈일 터이다. 그런 면에서 보더라도 씨에 대한 중국 공안 당국의 체포는 세인들로 하여금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사람은 중국에 체포되어 있고, 사람은 일약 팔자가 펴서 국회의원까지 사람인 김영환과 이석기 사람, 82학번 주사파’의 엇갈린 30년을 되돌아보지 않을 없다. 사람은 전두환 독재의 포악이 절정이던 1982 대학에 나란히 입학했다. 김영환 씨는 서울대 공법학과에, 이석기 씨는 한국외국어대 중국어통번역학과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두 청년은 운동권에 투신하며 사회변혁을 꿈꿨다. 두 사람은 또한 1989년엔 하영옥 씨(서울 법대 82학번) 등과 지하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한 동지였다. 그러나 김 씨는 1991년 밀입북 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자신의 사상까지를 개조하기에 이른다. 그건 김일성이 위선의 인물이라는 걸 간파한 까닭의 당연한 부산물이었다. 이후 김 씨는 민혁당 해체를 주도했으며 언론 기고 등을 통해서도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며 또한 북한 동포에게 진실한 애정은 모르되 북한의 추종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북한의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이며 “김정일 정권 타도를 위한 좌우 합작을 제안하는 등의 파격적 전향 행보를 보여왔다. 반면 이 씨는 여전히 진보의 중심에서 활동하면서 아울러 통합진보당의 자주파(NL)의 핵심으로 자리했다. 19대 총선에서는 한술 더 떠 비례대표 국회의원에까지 당선된 그는 하지만 비례대표 부정 경선을 벌인 당권파 경기동부연합의 리더로 지목돼 안팎으로 거센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퇴를 거부하며 19대 국회가 시작되는 때까지 버텨 결국엔 국회의원 신분이 된 그를 바라보는 심경은 착잡하다 못 해 솔직히 너무도 참담하다. 진보(進步)는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과 동시에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이란 매우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진보가 당초와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고 멀쩡한 사회를 엉망진창과 파렴치, 그리고 툭하면 거짓말 투성이의 공산주의로 변질코자 하는 행위는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망동(妄動)이다. 또한 그같은 진보의 그늘은 ‘그늘’의 의미 그대로 실로 어둡기 짝이 없는 시궁창과 하수구와도 같다고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론적으로 그늘도 그늘 나름이다. 가뜩이나 개념 없다고 손가락질 받는 요즘 일부의 아이들이 그릇된 진보의 썩어빠진 사상에 경도되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끝으로 올바른 현실 직시의 김영환 씨 귀국 노력에 정부와 국민 모두가 적극 나서길 목하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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