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일반부 우수상] 동지에게 부치는 마지막 편지

동지에게 부치는 마지막 편지


박은영


김형!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신록이 푸르게 영그는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캠퍼스의 여름도 이렇게 들끓어 오르는 자연과 우리의 푸르도록 무모했던 젊음으로 뜨거웠었는데 그 때가 눈에 선합니다.


벌써 졸업한지 22년이 지났네요. 세월이 유수 같다던 우리 어머니의 말씀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하긴 어머니의 말씀은 이제야 뭐든지 되살아나 생명을 얻습니다. 그 동안 듣도 보지도 못했다는 듯이 숨어 있다가 말입니다.


김형에게 편지를 보낸 지 5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김형이 세상을 떠난 지도 딱 그렇게 되었군요. 첫 편지는 제가 구형된 지 하루 만에 변호사에게 부탁해 보냈었지요. 변호사는 전화를 걸지 웬 70년대같은 감상행위냐는 눈빛으로 저를 보더랬습니다. 하지만 전화로는 저의 심정을 토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저의 이야기를 해야 했지요. 그 때의 저는 정말 분노해 있었습니다. 이 사회가, 제도가, 법이 한 젊은이의 인생을 논할 권리가 있냐는 원망과 억울함으로 점철된 굴절된 제가 서 있었습니다. 한동안은 교도소의 식사도 거부하고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저 또한 말을 섞지 않았습니다. 현실에 저항하다가 수감된 저는 그대로 간디요, 수치여사였습니다. 순수의 결정체였습니다. 식사를 하지 않으니 몸은 가벼워지고 정신이 또렷해 졌습니다. 일주일간의 단식으로 혼절한 후 교도소장의 지시로 강제로 식사를 하기 전까지.


한 달이 지나 조직의 파장이 수습되기 시작하자 수배되지 않고 암약하는 동지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교육받던 대로 동지들의 포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넝마를 주워 파는 노파에서부터 평범한 회사원, 심지어 간수들 중에도 우리와 뜻을 같이 하던 숨겨진 동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사식을 넣어주고 당의 지령을 전달했고,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독서를 하고 간간히 근육단련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의 지령은 끊임없는 정신교육과 사상단련에 힘을 써서 출옥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활동하되 이제 암약활동에 중점을 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고, 단식이나 저항보다는 이제 체력단련과 사회(?)진출을 통한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암약을 위한 방도라고 판단했지요.


교도소 생활로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엔 단식투쟁과 샌님같은 태도로 동료 수감자들의 위화감이 심했지만 살 붙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인지라 그러려니 하고 이해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중에는 단순 범법자가 가장 많았고 저 같은 사상범도 몇 있었습니다. 저처럼 운동 중 체포된 박형이라는 사람과는 도서관이나 운동장에서 책이나 활동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보수 저격자’,‘진보의 대꼬챙이’라는 별명으로 언론 활동을 하다가 간첩 활동이 꼬리가 잡혀 들어왔습니다. 그는 날랬습니다. 단지 이번 수감은 여기저기 동지들의 아이디와 주소로 기민하게 활동했지만 운이 없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출옥하면 더욱 더 정확하게 활동하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터넷 기술을 익히는 노력파이기도 했습니다. 그와 있으면 저도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과 사상을 매일 밤마다 익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간간히 다른 수감자들과 현실 정치에 대해 비판하고 사상을 퍼트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순한 범법자자 많았기에 사회에 대한 불만과 낭패감, 열패감은 그들이 저에게 귀를 열게 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쭐해졌습니다. 저의 능력으로 그들을 계몽시킨다고 착각했지요.


수감되고 6개월이 지나서‘이의기’라는 새내기 죄수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살인죄로 수감된 자였습니다. 또한 놀라운 것은 그가 우리 북부지부의 핵심간부였다는 사실입니다. 김형은 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1년 전에 변절하였고 소식이 끊겼다가 교도소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박형은 그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이의기’의 연설은 그 당시 대학생들이 하나같이 녹음을 해두었다가 따라할 정도로 논리적이요, 설득력 있는 내용이었고 그 외모는 어찌나 반듯한 지 그 때문에 운동판에 뛰어든 여학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저도 듣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났습니다. 그는 점잖고 또렷한 목소리에 마치 목사님처럼 사람들을 설득하는 연설가였습니다. 저처럼 행동파이기보다는 사상파요. 조직의 두뇌 역할을 하는 엘리트.


박형은 ‘이의기’를 더러운 변절자(Dirty Betrayer)라는 뜻에서 ‘더리비‘ 라고 별명을 붙여 그를 에둘러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빠지게도 그는 사람들과 애써 어울리려 하지 않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항상 예의바르게 대처했습니다. 박형은 점차 매몰차게 그를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험담했지만 ‘더리비’는 묵묵하게 자신의 작업을 했고, 다른 죄수들을 돕고, 이해하고 견뎠습니다. 박형의 무던한 핍박에도 ‘더리비’는 죄수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게 퍼지기 시작했고, 박형의 노력은 매번 좌절되었습니다. 약이 올랐지요. 더리비는 도서관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차분한 그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쯤 김형에게 편지를 여러 번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지요. 계속된 편지에 형수님으로부터 짤막한 회신이 왔습니다.‘김형이 많이 아파서 당분간 답장이 힘들다. 회사도 위태롭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김형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당시 동부지부 소속간부가 북한찬양의 글을 트위터를 통해 전파하고‘위대한 수령동지’라는 말을 여러 번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왜 김형을 아프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과로 때문이었을까요? 저에게 김형은 인생의 나침반이자 유일한 멘토였고 북부지부의 별이자 조직의 심장이었습니다. 김형의 소식은 가뜩이나 생기 없는 교도소 생활에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그러다 모두를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더리비를 평소 싫어하던 박형이 더리비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것이었습니다. 그건 무척이나 교활하고 유치한 행동이었습니다. 박형은 식사를 타서 지나가던 더리비의 발을 모른 척 걸었고 그 발에 여지없이 넘어지던 더리비는 나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고 잘 못 넘어지면서 고관절이 골절되어 한 달을 입원하고 목발을 짚은 채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목발 탓에 일상생활에 불편이 많았습니다. 교도소에서는 보다 못해 더리비를 거들어 주는 역할로 저를 지목했고 저희 둘은 도서관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더리비 변절에 저도 적잖이 거부감이 있었기에 처음에는 말을 떼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데면데면한 시간 속에서 그와 저는 한 몸이 되어 생활을 시작했고, 그런 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길에서 주워 온 개에게는 함부로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했는데 그를 돕고 함께 생활하다 보니 적대감이 안쓰러움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 서가 교체를 위한 책 정리작업 휴식간 그가 툭 말을 꺼냈습니다.


“양군은 그 그늘이 좋소? 행복하오?”


“여기 나무 그늘 말씀입니까? 시원하네요.”


“아니요. 수령동지 추종 북부지부 대책실 연락책 자리말이네.”


두둥.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습니다.


“우, 우리 조직 말씀입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의심은 체제의 사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최고의 무기다.”


“양형. 내가 이곳에 들어 온 이유를 아시오? 바로 그 그늘에서 아무런 풀도 자랄 수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오. 김형에게 안부나 전하시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변절자라도 현조직원에게 조직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도 그렇지만 “김형”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에는 요새말로 멘탈붕괴까지 겪었습니다. 어떻게 그가 김형을 알까? 물론 김형이나 더리비나 조직에서는 엘리트이자 선두주자였기에 어색하지 않은 질문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더리비는 더 이상 말없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업이 끝나고 숙소로 향하면서 저에게 책을 한 권 건네주었습니다.


“자네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읽어보게. 박형에게는 숨겨야 할 거야.”


제 손에는 한 권의 책이 쥐어졌습니다.‘진보의 그늘’. 서늘한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나까지 변절자 만들려고 저러나하는 거부감에 책은 캐비넛 깊숙이 찔러 넣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더리비는 혼자서 생활이 가능하다며 저의 도움을 거부하였습니다. 저는 적잖이 놀라고 불쾌했습니다. 도대체 변절자에게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냐는 생각에 말입니다. 박형은 더리비가 저렇듯 사람의 뒤통수를 치니까 변절도 이해된다며, 그 때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을 때 대갈박이 아작 났어야 했는데 라며 분해했습니다. 더리비의 행동은 저의 머릿 속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김형에게 더리비의 이야기를 써 보낼까 하다가 미루었습니다. 괜시리 혈압만 높일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책 생각이 났지만 매일 할당된 작업과 운동으로 책을 넘기기 귀찮았고 박형이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기에 읽기가 꺼려져 점점 잊혀져 갔습니다.


김형으로부터는 편지가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북부지부 동지에게 소식을 들으니 김형이 조직생활을 접었다고 하며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저는 충격이 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도대체 왜 김형이 조직을 떠났는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본인의 변절인지 조직의 권고인지, 아니면 당 차원의 작전인지 머리 속은 뒤엉켜 갔고, 저는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누구를 찾아가 답을 들을 수도 없는 처지이니 저 스스로를 괴롭히기로 한 것입니다. 위와 장을 비우고 생각의 탑을 지어 들어갔습니다. 이틀을 버티다가 결국엔 물을 마시고 집중할 것을 찾기로 했습니다. 문득 책이 생각났습니다. 단식을 시작하자 사람들은‘저놈이 뭔가 생각이 많아졌나 보네.’라면서 알아서 저를 멀리하였습니다. 귀찮던 박형은 당시 신막사 건축으로 제법 떨어진 지역으로 노역을 나가있어 저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책 저 책 읽다가 캐비넷 속의 그‘책’이 떠올랐습니다.‘진보의 그늘’.


저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은 대한민국 진보세력의 역사를 훑고 독자가 알기 힘든 각 진보통합세력에 대한 설명과 그들의 사상, 활동 내용을 제법 구체적으로 짚어가며 과연 이들이 대한민국의 역사 위에 인정받아야 하는 정치세력인가? 라는 질문과 함께 종북세력의 정체를 밝히면서 냉정한 평가를 내리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 북부지부의 내용도 제법 자세히 나와 있었습니다. 조직의 지시대로 핵심간부는 다른 사람으로 분하여 세간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김형의 이름은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역시 북부조직은 대단합니다. 일명‘민평회(民平會)라고 불리는 수뇌부는 한 번도 언론에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책에서도 빠져 있더군요. 노출 즉시 제명이라는 이른바 이 조직에는 일반 조직원조차 그 접근이 힘듭니다. 아마 ‘김형’이라는 일원을 아는 저 또한 조직에서는 매우 중요한 ‘핵심’이겠지요. 아니‘핵심’이었습니다. 그‘사건’이 후 전 암약지시(언론에 노출된 조직원이 비전향 상태에서 전향을 가장한 사회활동을 한다. – 대부분 보수세력 쪽 활동을 하다가 정치이해 충돌시 진보에 유리한 활동을 한다.)를 받았고, 이렇게‘사회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김형이 조직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김형!


김형이 저에게 김형을 대신하여 당 연락책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해 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저는 김형의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와 이렇게 사라지면 저는 어떤 이유로 이곳에 존재해야만 하는 걸까요? 당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보수당의 저지노력을 피한 도피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인간적인 실망과 서운함을 느꼈습니다. 대의를 위한 희생도 희생이지만 인간적인 절망감은 어쩔 수가 없네요. 정말 저는 당에게 이용만 당한 추종세력에 불과했던가 하고 자문했고 이 질문은 계속해서 저에게 바다 속 깊은 소용돌이처럼 보이지 않는 변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김형의 소식을 듣고자 꾸준히 그 주소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회신은 없었습니다. 박형이 수소문해보니 형수님은 아이들과 외국으로 이민을 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김형의 소식은 깜깜했습니다. 박형은 말라가는 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여느 때처럼 더리비의 욕을 하곤 했습니다. 잊고 있던 더리비.


왠지 그라면 김형의 소식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운 나쁘게도 더리비는 고관절 골절 후 합병증으로 재입원을 했습니다. 당장에 병원으로 좇아가 사정을 아냐고 묻고 싶었지만, 전 갇힌 몸. 더리비와의 만남은 나중을 기약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김형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기대했던 편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미안하다. 정민아. 모두다 거짓이었다. 당도, 나도, 너도 말이다.”


편지는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뉴스에 건물 옥상에서 투신한 40대 남자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익숙한 외형의 모회사를 가장한 북부지부 본부건물이었습니다. 물론 언론에서는 통일진보당 관계자 김모씨가 사망했다고 했습니다. 김형은 우리가 대학시절 함께 시위하고 노래할 때 두르던 붉은 스카프를 목에 매고 있었습니다. 모자이크가 허접하게 처리된 장면에서 제 두 눈에 또렷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붉은 스카프가 눈물 안에 그렁그렁 가득 차게 되었지요. 박형이 달려와 텔레비전 화면 앞에 그 네모난 얼굴을 들이대기 전까지 말입니다. 김형, 우리는 누구입니까?


그 즈음 더리비가 돌아왔습니다. 박형은 김형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실망을 더리비에게 풀 듯이 한층 강도가 세게 더리비를 몰아세웠습니다. 더리비는 묵묵히 모욕과 폭력을 견뎠습니다. 단 한 번 박형이,


“너 같은 변절자 때문에 우리 뜻이 저렇게 좌절되는 거다.”라고 속삭였을 때 그 두 눈에 불꽃이 반짝이는 것을 저는 분명히 보았지만 당시 저는 김형의 죽음으로 사상과 조직의 지시에 대한 회의에 차고, 생에 대한 의욕마저 꺾인 상태였습니다. 더리비의 부당한 시련에도 딱히 나서지 않았고, 오히려 박형의 구박이 묘한 카타르시스가 되었지요.


그 해 겨울 폭설로 도서관 외벽이 기울어지는 사건이 벌어진 밤이었습니다. 도서관 담당인 더리비와 서가 작업을 했던 저를 비롯한 죄수 몇 명이 작업을 거들기 위해 이른 새벽 투입되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작업이 길어져 간수들과 죄수들 모두 도서관 난롯가에서 외벽 보수용 작업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작업이 황망히 이루어졌던 터라 우연히 저는 더리비와 나란히 앉게 되었습니다. 작업차는 예상하지 못했던 폭설로 늦어졌고 우리는 언제 외벽이 무너질지 몰라 대기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리비는 말없이 불타는 난로 속을 바라보다 작은 목소리로 독백처럼 말을 꺼냈습니다. 주변은 모두 자기들 이야기로 제법 시끌시끌했지만 저는 두 귀 쫑긋이 더리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조직의 사상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했네.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나 제법 동네에서 똑똑하다고 소문이 나 집에서 거는 기대가 컸지. 부모의 바람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원체 잘난 놈들이 많아야지. 기업체 간부인 아버지나 전문직 어머니를 둔 동기들은 태생자체가 귀족처럼 느껴졌으니까. 조용히 생활하기엔 그 동안 받고 자란 기대가 너무 컸던가. 우연히 캠퍼스를 걷다가 현 정부의 부당함과 현대 사회의 부조리함을 통렬히 비판하는 동아리에 들었는데 너무 통쾌하더라고. 민초가 주인공이 되는 세상! 그야말로 나같은 개룡남에게는 기회의 천국을 여는 새로운 장이었지. 아니 그 기회를 국가에게 요구하는 인생시장의 니트 전략이라고 생각했었네. 거기서 멘토격인 김형을 만났고 우리는 각각 사상계통과 행동계통을 잇는 핵심세력으로 자랐지. 당의 보안과 위장이 어찌나 철저한지 나는 김형과 뜻을 같이 하긴 했지만 결코 표면적인 아는 척은 하지 않았네. 서로가 아는 조직원을 공유하지도 않았고. 우리는 정보과나 기무대의 수사망을 매번 피해갈 정도로 수많은 동지들의 비호 속에서 활동하면서 당의 성장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간에 못할 짓도 수없이 저질렀네. 당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꽃다운 청춘의 후배들을 줄줄이 감옥에 보내기도 했고, 북한에 억류된 사상전향자 가족들을 돌려보내지 않다가 그들이 사형당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네. 우리 정도면 당에 이야기해서 그깟 처자식 남한에 데려오는 것은 일도 아닌데, 우리가 당을 위해 모른 채 한 거야. 수많은 탈북자와 그 가족들, 쓰레기같은 당원놈들이 벌이는 추잡한 성추문들을 모두 덮고 지나갔지. 오직 당의 대의를 위해 이 나라에 꽃 피울 만인 평등의 아버지 뜻을 위해 말이네. 사이버 활동을 했던 박형같은 조무래기들은 가장 최끝 조직원이지. 그런 인간들이 수십 수백이라면 믿겠나? 그들은 사회 여기저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시사 사건이 벌어지면 바로 투입된다네. 어디 그 뿐인가? 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모든지 돈이 적잖이 든다네. 조직의 생명인 돈줄을 위해 사업을 벌이면 조직이 도와주고 당원이 투자를 했지. 김형이나 나나 경제적으로 보수세력 누구와도 뒤지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네. 품위를 유지하고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누리고 살기 시작한 여유가 어느 틈에는 생활이 되어 안주하고 싶은 생각이 된지 오래되었는데 인정하기 싫었다고 할까? 내가 꿈꾸었던 민초의 자유? 평등? 당에서는 그런 거 관심 없다네. 해마다 대선 때 여당 발목에 달 족쇄꾸러미가 민초 아닌가? 순진한 민초들은 우리가 정말 자신들의 드림을 위해 존재하는 양 지지하고 말이지. 딸이 하나 있는데 미국에 유학을 보냈고 아내는 각종 사교장의 꽃처럼 화사하게 꾸미고 사치를 떨며 다니기 시작했지. 이보쇼. 양군. 70년대 햇빛 안 통하던 지하방에서 통기타 들고 사상가 부르던 시대는 다 드라마야. 돈이 있어야 활동을 하고 보다 영악하고 빠르게 활동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아이폰과 노트북 들고 스타벅스에 앉아서 디도스 심는 게 요즘 우리가 하는 일이니까. 요즘 애들 땀 안 흘리네. 최초의 순수했던 민주주의 투쟁이 북한 이념전파를 위한 최선봉이 되었지. 아니 원래 썩은 물인데 하도 물장난을 쳐 놓으니 흙탕물인 게 안 보였던 것뿐이네. 그 구정물에서 조금만 발을 떼면 얼마나 더러웠던 물인가 하고 깜짝 놀란다니까.


사업은 순조롭게 잘 되었네. 당에서도 만족스러워했지. 수입의 상당부분을 북한에 송금했고 그 돈으로 당간부들의 생활이 굴러갔다네. 요트를 사고, 해외 골프장을 다니면서 간첩질


하는거야. 나나 김형이나‘원탁의 기사들’의 핵심이었고 그러다보니 동업으로 벌이는 사업도 꽤 되었지. 보통 내가 투자자를 모으면 사업체를 굴리는 건 김형의 몫이었네. 똑똑했지만 행동파였던 경력 때문이었는지 꽤 다혈질이었지. 그가 흥분해서 그르칠 뻔 한 일들을 뒤에서 수습하는게 내 몫이었네. 자네는 김형을 꽤 좋아한 것 같은데 그 사람이 매력이 있긴 했지. 주변에 정부도 여럿 두었네. 그 아내는 그걸 알면서도 김형이 주는 재정적 윤택함이면 남편의 부정까지도 눈 감아 주겠다는 것 같았어. 들리는 이야기로는 아내도 아내대로 외도를 하고 있었다지. …….이야기가 너무 딴 데로 샌다고 생각하겠군.


사건이 일어난 건 우리가 구상한 사업이 대박이 났던 그 날이었지. 우리는 오랫동안 작전 세력을 심어서 주식시장에 가상의 사업체로 많은 루머를 만들어내고 있었어. 예상외로 성공해서 우린 많은 돈을 벌었고, 김형과 나는 그날 술을 진창 마시게 되었지. 그런데 그 날 술 마시다 흥분한 김형이 술집 종업원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 아가씨가 불쾌해 하자 그녀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어. 다른 아가씨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방을 나갔고 나는 김형을 말리기 시작했네. 술기운에 흥분한 김형이 재떨이를 잡아 그 아가씨를 내리쳤는데 아가씨의 말랑한 머리가 그대로 패이는 게 보였어. 김형은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니었고 난 재떨이를 뺏어 들었지만 아가씨는 고꾸라지고 다른 종업원들이 룸에 다시 들어왔을 때는 김형은 쓰러져 잠들어 있고, 난 피 묻은 재떨이를 들고 멍하니 서있던 상황이었다네. 어이없는 실수가 그 동안 우리가 쌓아 온 모든 것을, 아니 무너지려고 위태위태했던 탑에 살짝 손가락만 갖다 댄 꼴이 되었지. 당은 발 빠르게 사건을 조사했고, 당원이었던 검사와 형사들에게 지령을 내렸지. 증인이 없으니 결론은 나를 아가씨 죽인 범인으로 삼자는 내용이었어. 주가 조작을 했던 작전 내용이 최근 거래소 조사대상이 되었는데 핵심인물로 내가 지목되었던 거야. 우리 배후에는 최근에 국회에 입성한 중요한 분이 계셨거든. 다치면 안 되는 분이었지. 조사를 받기 전에 감옥에 조용히 가둬 놓는 것이 당을 위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린 거야. 난 즉각 반발했지만 당의 결정엔 변함이 없었네. 난 배반과 굴욕감에 당을 나왔네. 내가 믿던 민중을 위한 삶은 애초부터 없었던거야. 물욕과 권력욕에 얼룩진 또 다른 정치세력 중에 더러운 일을 도맡아 살아온 늙은 개처럼 난 인생을 통틀어 초라해지고 비참해졌지. 순진한 박형 같은 치의 모욕은 내 스스로의 단죄로 따지면 아무것도 아니었네. 그 일로 김형은 나에게 빚을 지었지. 재판장에서 마주친 그 눈을 잊을 수가 없구만. 굴욕과 죄책감,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그 눈. 바로 내가 평생을 그늘로 의지한 우리 북부지부, 아니 당 수령의 그늘이었네. 잔풀도 자라지 않는 그 모진 그늘. 결국엔 질척한 이끼로 뒤덮여 진실이 가려지는 그늘. 자, 양군 자네는 왜 이곳이 있나? 사람을 죽였나? 물건을 훔쳤나? 아니면 나처럼 그늘에서 벗어나 햇볕에 노출되었나?


김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겠지. 사실 전 주에 나에게 편지가 왔네. 지난 일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더군. 내가 수감되고 꽤 오랫동안 몸이 아팠다고 하더군. 하던 사업도 제대로 운영이 안 되자 지부에서는 그를 제명처리하고 암묵적인 협박으로 가족들을 외국으로 보내라고 종용했다네. 언제든지 그가 한국 언론에 당과 관련된 언급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기 위해서였지. 나에게는 물론이고, 그가 진짜 죽인 수많은 청춘들과 진실들에게 말이야. 그리고 이 조국에 말이야. 지금도 당의 협박에 못 이겨 활동하는 간부들이 많이 있네. 가족들 목숨을 간첩들에게 담보로 잡히고 사는 산 목숨 아닌 목숨들 말이네. 차라리 산 사람들 죽이고 죄책감에 사느니 이렇게 갇혀 있는 게 평생 사죄의 방법이 아닌가 싶네. 우린 그 동안 너무 못할 짓을 했네. 그냥 사상범이 아니야. 매국노야 매국노.”


김형.


나는 그 날 이후 아주 오랫동안 단식을 하고, 혼절하고, 다시 단식을 하다 병원에 가길 반복했습니다. 박형과 더리비는 이감이 되어 헤어지게 되었죠. 박형은 떠나면서 사회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그도 나의 변화를 눈치챘는 지 다소 경계하던 눈빛이었습니다. 그리고 더리비는 나에게 힘든 결정을 내릴 때가 곧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작년 가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천안함 사건이 터졌고 고향에서 맨발로 논둑을 내달리며 히죽 웃던 조카 녀석이 그 사건으로 죽었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다음 주면 출소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편지는 당 본사에 도착할 뿐 아니라 인터넷 광장에 게시될 것입니다. 많은 당원들이 악플과 함께 거짓투성이 괴문서라고 치부하는 댓글을 달겠죠. 그 중에는 박형도 있을까요? 저는 물론 티브이 인터뷰와 라디오 출연도 할 것입니다. 제가 그 동안 살았던 당의 그늘이 얼마나 많은 진실의 풀을 짓밟았는지 증언하고 사죄해야죠.


존경했던 김형! 하지만 이제 볼 수 없고 불쌍하게 덮어진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저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람들 모두가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북한의 어이없는 공격으로 저 세상으로 간 청춘들, 그리고 우리의 사치스런 농간으로 푸른 하늘 아래 당이 가르친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순진한 젊음들에게 우리가 아는 진보는 그게 아니었다고, 다시는 그렇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을 알려드리려 하늘에 계시는 김형에게 이렇게 편지를 부칩니다. 부디 하늘에서도 저를 응원해 주십시오.


이 곳 안양의 녹음이 깊어갑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 오랜 동지 양정민 올림.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