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9일은 10여년 전부터 존망이 거론돼온 북한 정권이 수립 60년을 맞는 날입니다. 북한 정권은 대한민국 정부 60년과 나란히 역사를 이어오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들고 최근 10여년간은 북녘 주민들을 기아 선상에 몰아넣은 채 핵도박을 벌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북한 정권에 대해 ‘현실적인 위협’이라거나 ‘골방에 가두어 놓고 싶은 존재’ 등 다양한 평가가 있으나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체제라는 데는 일치합니다. 연합뉴스는 앞으로 북한 정권이 어떤 길을 걸을지에 관심을 두고 권력, 경제, 대남전략, 주민 의식 면에서 60년간의 북한의 변화를 짚어봅니다>
체제유지 `선군’이냐 ‘개혁.개방’이냐 딜레마
북한 정권 60년은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세습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나이 66세와 맞물려 북한 권력의 3대세습 문제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증폭되는 시발점이 됐다.
북한의 폐쇄적 특성상 지배권력층의 동향이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북한 내부에서도 김정일 위원장의 권력 승계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라는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한 세대전 부자세습 때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악화된 대내외 여건에서 북한 정권이 지난 60년의 역사를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변수가 김 위원장의 권력승계 문제라는 데 북한 전문가들은 이의를 달지 않는다.
1945년 9월 일제가 패망한 지 한달 후 소련에서 원산으로 북한에 들어간 김일성 주석은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했다.
공산당 북조선분국(1945.10)과 북조선노동당(1946.8) 창립,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1948.2) 수립, 인민군(1948.2) 창설 등을 거쳐 실권자의 기반을 다진 그는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내각 수상에 취임한 데 이어 이듬해 6월 합당한 남북노동당 중앙위원장에 추대됨으로써 최고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국내파,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등 김 주석과 정치적 경쟁을 벌이던 여러 정치세력이 있어 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김일성은 6.25전쟁을 통해 허가이(소련파), 무정(연안파), 박헌영(남로당파) 등 ‘이질적인’ 정파의 거두들을 숙청하고, 1956년에는 자신의 경제발전 노선과 개인 숭배, 빨치산의 ‘혁명전통’에 정면 도전한 연안파와 소련파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빨치산파의 단일 지배체제를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1967년에는 빨치산파 내부의 ‘이질적’ 세력이었던 ‘갑산파’마저 숙청하고, 1969년 정통 빨치산파이지만 자신의 권위를 훼손한 김창봉 등 ‘군벌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으로 절대 권력자로 자리매김했다.
이어 그는 1972년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에서 헌법 개정과 국가기구 개편을 통해 주석제를 신설함으로써 북한 체제의 명실상부한 정상이 됐다.
김일성의 유일지배는 그의 후계자로 낙점된 김정일 위원장에 의해 더욱 강화됐고 이는 김 위원장의 유일지배로 이어졌다.
김일성의 일인지배 확립 과정이 정치적 경쟁세력과의 권력투쟁이었다면 김정일 위원장의 일인지배는 친인척과의 싸움이었다.
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 확립으로 그의 아들로의 권력세습엔 별다른 장애가 없었지만, 권력 2인자인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이 삼촌인 데다 김 위원장의 계모인 김성애가 여성동맹 중앙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정치적 파워를 과시하고 이복동생 김평일에 대한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은 김 위원장의 권력기반 강화에 큰 걸림돌이었다.
김 위원장은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에 들어간 뒤 ‘반종파 투쟁’과 `종파 여독’ 청산과정, 김일성 우상화 등을 통해 충성심과 자질을 인정받아 1973년 당 조직 및 선전비서가 되고 마침내 이듬해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이후 김 위원장은 ‘곁가지’라는 김성애와 김평일, 김영주 세력을 철저히 거세, 권력에 도전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했다.
그는 김일성 주석이 경제에 전념토록 하고 자신은 당사업과 당기구 체계의 개편을 통해 노동당을 장악하고 당을 통해 국가권력 전반을 장악해 나갔다.
1970년대 말에 이르면서 이미 김 위원장의 지위는 김 주석과 동격의 수준으로 절대화됐고 실질적 권력면에선 오히려 김일성 주석을 훨씬 능가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 지위를 대외에 공식화한 1980년 10월 당 제6차대회 이후엔 김 주석은 상징적인 존재로 점차 실권에서 멀어진 반면 김 위원장은 막후 통치자로 군림했다.
김 위원장은 1990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91년 군 최고사령관을 맡은 데 이어, 93년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승계에 대비한 절차상의 준비도 마무리했다.
1994년 김 주석이 사망하자 김 위원장은 공식 승계를 뒤로 미룬 채 3년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한 ‘유훈통치’에 들어갔으며 3년상이 끝난 1997년 10월 김 주석이 가졌던 노동당 총비서에 추대됐고 이듬해 9월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를 통해 김정일 후계체제가 종식되고 김정일 정권이 공식 출범했다.
북한은 이 회의에서 주석제를 폐지하고 명목상 국가대표 기구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신설, 국방위원회의 권한 강화 등을 골자로 한 ‘김일성 헌법’을 발표하고 김정일 위원장을 사실상 북한 최고지도기관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재추대했다.
김 위원장의 공식 권력승계는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24년만에 비로소 완료됐지만, 이미 북한을 완전히 장악.통치해온 김 위원장에게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김정일 정권이 내세운 통치 슬로건은 선군정치.
김일성 사망으로 북한 사회 전반이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잇따라 들이닥친 최악의 자연재해들은 그동안 북한 사회에 축적됐던 온갖 사회경제적 모순과 약점을 일시에 수면 위로 드러냈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 북한의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붕괴되고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불법.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통제기능이 마비되는 등 북한은 무정부 상태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김 위원장이 의지할 수 있는 보루는 군부 밖에 없었다. 결국 군을 우대하며 군에 의존해 위기를 타개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군부통치가 실시됐으며, 이는 김정일 정권의 공식 출범과 함께 ‘선군정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한 정권에게 선군정치는 대내적으로 체제 안정과 결속, 경제 재건과 발전을 이룩하고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핵억제력을 갖고 2006년 핵실험을 통해 “미국과의 대결전을 승리로 이끈” 북한식 ‘만능 보검’인 셈이다.
강력한 군부통치로 유지해온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해 김 위원장은 이제 후계문제에 대비해야 할 시점이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62세 때 자신을 후계자로 내정한 것에 비해 4년이나 늦은 시점임에도 아직 겉으로는 후계구도관련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는다.
김 위원장이 3대 세습을 선택할지, 아니면 제3자를 내세울지, 끝까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소련의 스탈린처럼 훌훌 떠나버릴지 아직 모두 추측의 영역이다.
이는 김 위원장이 후계자에게 물려줄 유산이 주민들의 하루 세끼 끼니조차 해결해주지 못하는 거덜난 경제와 국제사회의 비난과 고립을 자초하는 핵무기 뿐이라는 데 주요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 입장에선 자신의 후계자 지명 때에 비해 터무니없이 취약한 기반을 가진 후계자를 위해서라도 핵카드를 활용한 북미관계 정상화와 경제 회생 등 권력의 안정적 승계를 위한 대내외 환경 개선이 최우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당장 체제유지를 위해선 군부에 의존한 선군정치가 필요하지만 장기적 관점의 체제유지를 위해선 선군정치를 포기하고 개혁.개방을 해야 하는 딜레마에 갇혀 있으며, 여기서 탈출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최진욱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입장에서 자신은 계모와의 살벌한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아 아버지처럼 최고 권력자로서의 모든 것을 누렸지만, 인간인 만큼 자식에게 현재의 낙후한 북한을 물려줄 경우 자칫 조선왕조처럼 망할 수 있다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 실장은 “김 위원장은 자식을 위해서라도 향후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안전보장을 받아내는 등 대미관계 개선 문제를 하루빨리 결판짓고 남한과의 관계개선 등 정치.외교적 안전판을 마련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