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정권 60년] 대남 ‘적화통일’서 `체제생존’으로

북한 집권당인 노동당의 규약은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의 완수”를 명시하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규약의 ‘개정’을 언급했었지만, 1980년판 개정 규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분단상황에서 북한에 ‘남조선 혁명론’은 체제를 유지해온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

북한 지도부는 남한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운 6.25전쟁을 일으켜 ‘국토 완정’을 노렸으나 미군의 참전으로 무산된 뒤 북한 지도부는 남한에서 `인민민주주의혁명’을 꿈꿨다.

북한의 `혁명 역량’을 강화해 이를 남한에 확산한다는 1950년대 ‘민주기지론’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남조선혁명론’은 남한 내의 혁명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 북한의 사회주의 역량과 합작해 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특히 ▲남한내 혁명역량 강화를 비롯해 ▲북한 자체 혁명역량 강화 ▲국제적 혁명역량 강화 등 이른바 `3대 혁명역량 강화론’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남한에 지하당인 통일혁명당의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케 했으며 남한내 혁명운동에 대한 지원이라는 명분아래 청와대 기습사건과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등의 사건을 벌였다.

북한의 이러한 전략은 정치.경제적으로 자신들이 우세하다는 ‘과대 평가’와 남한 사회에 대한 오판에서 비롯됐다.

일제 식민지 때 한반도의 남쪽은 농업 중심으로, 북쪽은 공업 중심으로 편성됐으며, 한국전 때 시설이 많이 파괴되기는 했지만 북한은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의 지원속에서 70년대 초까지 일정 기간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우위에 섰고, 그에 따라 “남조선 혁명”을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한 사회는 한국전을 거치면서 반공 이념이 지배적이 됐고 60년대부터 경제가 고도성장하기 시작해 남한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북한이 기대하는 “혁명 역량”이 생길 틈이 없었음에도 북한은 이를 깨닫지 못한 채 1980년대까지 이러한 대남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북한의 대내외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대남정책의 변화를 강요했고 북한은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1980년대말부터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을 시작했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했으며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정책이 본격화됐다.

1990년 북한을 방문한 예두아르트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교장관은 남한과의 수교방침을 통보했고 중국은 남한과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수교의 수순을 밟았다.

북한의 외교적 고립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의 붕괴는 북한 무역시장의 박탈로 이어졌고 중국과 소련은 북한에 대해 구상무역을 중단하고 경화결제를 요구했다.

또 KAL 858기 폭파사건 등 북한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국가를 포함해 전 세계 159개국이 참가한 1988년 서울올림픽은 남한의 저력을 세계에 과시하는 계기가 됐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국제외교적으로 더 이상 남한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입지가 극도로 위축된 북한의 입장에서는 대남정책의 변화를 모색할 수 밖에 없는 궁지에 몰린 셈이다.

그동안 남한의 `적화’에 골몰해온 북한은 이제 남한에 ‘먹히지’ 않기 위한 ‘공존’의 틀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김일성 주석은 1991년 1월1일 신년사에서 고려민주연방제 창립 방안을 언급하면서 “조국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구에게 먹히지 않는 원칙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 두 개의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를 언명한 이 입장은 이른바 ‘완성형’ 연방제 통일 주장이 `잠정적, 단계적’인 연방제 통일 주장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북한은 남한과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고위급 회담을 갖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당시 회담의 주역이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당시 북한은 수세적인 국제상황 속에서 회담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며 “북한이 최근 다른 합의서를 언급하면서도 기본합의서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해 기분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일성 주석은 1993년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회의에서 밝힌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에서 “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에 대한 우려를 다 같이 없애자”며 공존을 강조하고 “접촉.왕래.대화를 통해 전민족이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며 단합해야 한다”고 말해 흡수통일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 사회의 개혁이 이미 진행중인 사회 내부의 변화를 흡수하는 형태의 수동형으로 진행된 것과 마찬가지로,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공존 전략도 국제사회의 환경변화에 따라 수동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4년 김 주석 사망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 체제가 본격화되고 경제적으로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겪으면서 체제생존을 위한 공존에 무게를 둔 북한의 대남전략은 더욱 본격화됐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0년과 2007년 남한의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국제사회에 `남북 공존의 틀’을 강조했으며, 남북 군사적 대치의 최전방 지역인 금강산과 개성을 남북 경제협력의 장으로 내줬다.

또 각종 `경제협력’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남한을 단순히 공존의 대상뿐 아니라 협력의 파트너로 활용하고 있다.

남한에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6.15공동선언과 10.4남북정상선언을 둘러싼 대립이 이어지고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까지 겹침으로써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일시적인 병목현상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는 것도 이러한 구조적 환경에 변함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국제환경을 비롯한 구조적 변수는 여전히 남한측에 좋은 조건인 만큼, 우리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북정책을 펼친다면 6.15나 10.4선언을 넘어서는 새로운 남북간 합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탈냉전의 국제관계 속에서 남북관계는 남이나 북이나 모두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북한은 1990년대부터 미국에 대해선 핵카드를 꺼내들고 체제 생존을 건 도박에 나섰다.

북한은 이미 1970년대부터 옛 소련의 도움을 받아 풍부하게 매장된 우라늄을 이용하는 원자력 산업에 관심을 보여왔지만 1990년대 들어 북한의 핵기술은 전력 생산을 위한 산업용에서 벗어나 무기화를 지향하는 ‘군수형’으로 변화했다.

북한은 1991년 대남 공존 전략을 추구하는 가운데 미국이 한반도 핵무기 철수를 발표하자 남한과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을 체결하고 이듬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했으나, 1993년 IAEA가 영변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며 핵비확산조약(NPT)의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핵카드 구사를 본격화했다.

북한은 미국과 긴장을 고조시킨 끝에 1994년 10월 제네바 북미 핵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포기와 미국 등의 경수로 공급 및 북미관계 개선을 주고 받는 ‘성과’를 얻어냈다.

미국에서 대북 강경기조의 조지 부시 행정부가 새로 들어선 후 2002년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를 제기, 제2차 북핵 위기가 터지자 북한은 늘 하던 대로 벼랑끝 전술로 대응했다.

결국 부시 행정부는 압박보다는 협상을 통한 핵문제 해결로 기조를 바꿔, 6자회담이라는 틀을 이용해 북한과 양자대화를 갖고 지루한 협상을 벌인 끝에 핵문제는 동결과 불능화 단계를 거쳐 폐기 단계로 향해 가고 있다.

북한이 검증문제를 놓고 미국과 기싸움을 벌이고 있어 차질이 빚어지고 있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북한은 핵폐기를 향해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과 북한이 핵무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함께 나온다.

장기적 낙관론 쪽인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지향해 가는 것은 분명한 만큼 현재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 등의 이유로 핵문제 진전이 차질을 빚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 해결이 이뤄지게 될 것”이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북한과 관계를 관리하면서 북미관계의 중재자로서 역할해야만 미래에 동북아와 국제사회에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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