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北 토지개혁령은 ‘협동농장’으로 변질됐다

북한은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발표했다.


이 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의 명의로 발표된 토지개혁법령의 기본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와 5정보 이상 소유한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하고 소작제를 철폐하며 몰수된 토지들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는 것, 즉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토지개혁법령의 기본원칙이었다.


다만 5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자라도 스스로 경작하는 경우 무상몰수에서 제외되며, 5정보 이하를 소유했다 해도 소작을 주는 경우 소작지에 관해 무상몰수를 진행하도록 규정했다.


무상 몰수한 토지는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무상 분배 할데 대해 ‘몰수한 토지전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영원한 소유로 잉여한다’(제5조)고 규정해 농민들에게 토지소유권을 부여했다.


또 법령 10조에서는 ‘농민에게 분양된 토지는 매매하지 못하며 소작 주지 못하며 저당하지 못한다’고 규정해 토지의 유동화를 법적으로 금지시켰다.


1946년에 발표된 북한 토지개혁 법령은 당시 농토의 58%가 4%밖에 안되는 친일지주들의것이었고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80%가 빈농계층을 이루고 있었던, 낙후한 식민지농업국가였던 북한의 실정이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주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던 법령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해방 후 각계 정파의 정치세력이 대두하여 새 조선 수립에 참여한, 복잡 다난했던 당시의 정치정세 하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민심을 쟁취하고 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질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북한에서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와 공산당의 주도하에 각 리단위로 5~9명의 고농과 소작농을 중심으로 전국에 11500개의 농촌위원회와 90697명의 농촌위원들을 조직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또 18~35세의 농민들 중 건장하고 핵심적인 청년들로 21만명의 반군사조직인 자위대(반군사조직)를 조직해 농촌위원회의 사업을 뒷받침했다.


3주간에 걸쳐 진행된 토지개혁을 통해 무상몰수한 토지의 98%가 빈농을 비롯한 농민들에게 분배됐으며 1인당 4천평의 토지를 분여받은 농민들은 최대 숙원이던 땅의 주인이 되어 열과 성을 다해 농사를 짓고 공산당에 충성을 다하는 수많은 열성농민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북한 전지역에서 토지개혁에 앞장섰던 9만여 명의 농촌위원회 위원들은 북조선공산당원이 되고 열성농민이 되었고 농민들의 이러한 변화는 곧 김일성 정권의 강화에 이바지 했다. 


1945년 12월 4530명에 불과했던 북조선 공산당원 수는 1946년 4월 2만 6천명으로, 그 해 6월에는 35만 6천명으로 확대되었다.


사회주의 협동화 이행의 첫 걸음인 토지개혁의 성공적인 실시는 당시 새롭게 조직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강화를 이루는 발판이 되었다. 또한 1946년 11월에 실시된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와 1947년 2월의 읍, 면, 동 인민위원회 선거를 성과적으로 치르는데 이바지했다.


당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의 주도하에 진행된 토지개혁이 환영을 받았던 것도 시, 군 인민위원회 위원의 36.4%, 면 인민위원회의 58%, 리 인민위원회 위원의 86.7%를 농민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당대에 북한의 이름난 소설가였던 이기영은 단편소설 ‘개벽’(1946)과 장편소설 ‘땅’(1949)을 통해 일제시기 땅이 없어 고생하던 북한의 농민들이 토지개혁법령을 통해 땅을 분배받고 자기 땅에서 농사짓게 된 기쁨과 그들의 삶을 소개했다.


그러나 1946년 토지개혁법령에 의해 실시되었던 북한에서의 토지의 개인소유화는 1954년부터 시작되어 1958년에 끝마친 농업협동화의 실현과 함께 종결되고 말았다. 개인 소유 땅은 없어지고 농민들은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인부 신분으로 전락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농업 생산력 저하가 말해주듯이 북한도 명분은 공동소유 였으나 철저하게 관료 중심으로 이익이 분배됐다.  


토지개혁 법령 5조에 밝혔던, ‘무상 분배한 땅을 영원히 농민의 소유로 한다’는 정부의 약속은 한갓 휴지장에 불과한 것으로 끝나게 되었다. 자기 땅에서 마음껏 농사를 짓는 꿈이 이루어졌다던 북한 농민들의 소박한 기쁨도 영원히 끝나버리고 말았다.


1958년부터 오늘까지 반세기가 넘는 동안 북한에서 주장하는 중앙집권제원칙에 기초해 실시되고 있는 농업협동화방침의 그릇됨은 오늘날 북한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통해 재론의 여지없이 실패로 귀결됐다. 


농민들은 수익 창출이 없는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집둘레에 있는 개인경작지나 산이나 등지에 만든 개간지를 통한 식량 해결에 나서고 있다. 실제 개인 경작지의 생산성은 협동농장의 몇 배에 달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땀을 흘린만큼 노력의 대가를 보상해주는 소토지에는 온갖 정성을 쏟아붓지만 아무리 일해도 빈궁만 차려지는 농장일은 하는둥 마는둥 시간만 채우면서 요령껏 일하는 시늉만 한다. 


‘고난의 행군’을 기점으로 해 시작된 이 ‘개인 소토지’문제로 북한 정부는 단속기관들을 동원해 끊임없이 통제에 나서고 있지만 주민들의 땅에 대한 집착은 더 증가되고 있다. 


북한 당국이 식량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땅을 농민에게 돌려주면 된다. 토지의 개인소유화를 다시 장려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며 최고의 정책이라는 점을 북한 당국자들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정책을 보류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