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대통령 國葬과 김일성 장례식의 차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과정을 지켜본 탈북자들 중에는 김일성 사망 당시 북한의 모습을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94년 7월 8일 낮 12시, 북한의 모든 선전 매체들이 김일성의 서거 소식을 알리자 일반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간부들조차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건강하고 젊어보였던 김일성이 그렇게 갑자기 사망하리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북한 정권이 수립 이후 오직 김일성 한사람만이 지도자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북한에서는 ‘전례’라는 것도 없었고, 김일성의 사망과 관련한 의전을 미리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생각이었다.

김일성 사망 다음날인 9일 방송을 통해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김일성동상에 호상(護喪)을 선다는 소식이 보도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각 도, 시, 군들에서 간부들과 대학생들, 보위부와 안전부까지 동원되어 김일성동상 호상사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처음에 ‘10일장’을 결정했으나, 김정일이 “인민들이 수령님과 헤어지기 아쉬워한다”면서 3일을 연장해 결국 7월 20일에야 장례가 치러졌다. 각급 조직별로, 가족별로 생화를 준비해 김일성 동상을 찾아 애도를 표했으며, 동상이 없는 시골 에서는 김일성연구실에 있는 초상 앞에서라도 애도를 표시했다.

김일성 장례에 대해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은 생화에 대한 추억이다. 전체 인민들이 총동원해 매일 생화를 들고 동상을 찾으려니 북한에 꽃이란 꽃은 남는 것이 없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김일성, 김정일 생일날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다. 이 시기를 이용해 한시적으로 꽃장사에 나서는 주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평소 북한 돈 5원밖에 하지 않던 생화 한송이는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50원까지 뛰어 올랐다. 그것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러자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여지기도 했다.

함흥 출신 탈북자 이모씨(2008년 입국)는 “계속되는 꽃수요로 생화가 점차 없어지자 종이꽃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겼고 간부들은 ‘생화는 수령님께 바치는 우리의 충성심의 표현’이라며 어떻게 해서든지 생화를 준비하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했다”며 “시내에는 꽃이라는 꽃은 모조리 동원돼 꽃을 마련하기 위해 차를 타고 시골로 떠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회고했다.

7월 20일, 김정일은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된 김일성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평양 시내를 한바퀴 돌고 다시 의사당에 안치하도록 조치했다. 이날 아침 평양시민들은 김일성의 영구차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내몰렸다.

영구차가 지날 때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은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 수령님’하면서 통곡했다. 지방 주민들도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TV시청을 통한 장례식에 참여했다.

기자가 김 전 대통령의 국장 과정을 지켜보며 가장 놀랐던 점은 한국의 언론과 국민들이 김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 자유롭게 논하는 모습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일생을 재조명하고 재임기간 공과를 평가하는 것, 그에 따라 장례의 격이 ‘국민장’이 돼야하는지 ‘국장’이 돼야 하는지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 그 모두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또 하나 이채로운 점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장례 행사에서 그 누구도 조의를 표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김 전 대통령과 정치 사상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정치인이나 전직 대통령부터 일반 국민들까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조문했고, 장례위 측은 그들을 공손히 받아 들였다.

평양에 거주했던 탈북자 윤 모씨(2009년 입국)는 “애도 기간에 정말 힘들었다. 사실 친부모님이 돌아가셨어도 그렇게 울지 못했을 것”이라며 “직장에서 조직적으로 가는데 안갈 수도 없고, 동상 앞에 가면 사람이 많아 보통 4∼5시간 기다려야 차례가 됐는데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빨리 끝나고 집으로 갔으면 하는 생각만 했었다”고 말했다.

당시 소학교 학생이었던 탈북자 김 씨(2007년 입국)는 “오전 수업이 끝나면 학급별로 줄 지어 김일성 동상으로 향했는데, 학급선생님이 꽃송이를 가져 오고 안가져 오는 사람을 매일 확인하기 때문에 부모님들께 꽃을 사달라고 졸랐다”며 “어른들이 수령님 같은 분이 없다면서 슬퍼하니 멋모르고 함께 울었다”고 회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과정을 보면서 기자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닥치게 될 김정일의 사망을 상상하게 된다.

김정일이 확고한 후계구도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김일성이 누렸던 호사스런 장례식이 재현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김정일은 권좌에 앉아 있는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다. 죽은 김일성을 위해 금수산기념궁전을 초호화판으로 꾸미는 동안 수백만의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유일적지도체계와 선군정치를 보장한다는 명목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교화소와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어 나갔다.

김일성을 추모하며 북한 주민들이 흘렸던 눈물도 더 이상 기대되지 않는다. 지난 20년간 인간 김정일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마저 모두 고갈돼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음속으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그 자체에 대해 전혀 동정 받지 못하는 인생이라면, 사람으로 태어난 의미가 하나도 없다는 북한 사상의 ‘혁명적 인생관’을 곱씹게 된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 그것이 김정일이 동정받을 수 있는 마지막 이유라는 점에서 씁쓸함은 더욱 커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