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마저 잃어버린 한국 성인TV 포르노의 기억

▲ TV를 시청하는 북한 주민 <기사 내용과 무관>

최근 북한에 포르노 비디오물이 많이 나돈다고 한다. 음란물 CD 한 장을 한 시간 동안 빌려보는데 2000~3000원이라는 소식이다.

중학생 아이들도 서로 돈을 내고 음란물을 돌려보고, 이를 큰 자랑으로 여기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포르노 때문에 함께 중국까지 탈북했던 친구와 헤어진 가슴 아픈 추억이 있다. 북한을 탈출하여 2박 3일째. 얼음이 된 밥덩이를 떼어 먹으며 친구인 신영일과 함께 중국땅 왕청현 백초구에 들어 선 것은 2003년 12월 29일이었다.

그곳까지 목표를 정하고 간 것은 아니었다. 추운 겨울에 당장 거처할 곳이 없었던 우리는 일거리를 주겠다는 사람을 만난 곳이 왕청현 백초구의 작은 농촌마을이었다.

주인은 마을에서 5리 가량 떨어진 산막(山幕)으로 안내하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장작 패는 일을 하였다. 주인이라는 사람은 닷새에 한번씩 차를 몰고 와 나무를 실어가곤 했다. 그 때마다 쌀과 부식물을 조금씩 가져다 주었다.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소형 라디오였다. 전기도 없는 산막에서 밤새 라디오로 한국방송을 들으며 언젠가는 꼭 한국으로 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밤늦게까지 가족들 이야기를 나눌 때면 영일이의 눈은 언제나 축축이 젖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영일이는 엄마와 누이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의 누이동생 영심이는 참 곱게 생겼었다. 힘없는 집안 탓에 영일이는 집단동원이나 돌격대(대규모 건설이 있을 때 사람들을 동원해놓은 집단) 같은 것이 있으면 빠지는 법이 없었다.

영심이도 ‘6.18 돌격대’라는 곳에 나갔었는데, 얼굴이 곱게 생긴 덕에 그곳에서 통계원으로 뽑혔다. 하루 생산실적을 조사하고 보고하는 통계원 일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돌격대에서 유일하게 화장을 하고 다니는 통계원들은 대대장이나 정치 지도원의 공개된 노리개감이었다. 그런 자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은 너나없이 통계원 일을 원했다.

2년간 돌격대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 온 영심이는 군에서 제대한 총각과 결혼하였고 금슬좋은 부부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영심이의 돌격대 생활을 흠잡으며 집안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걸핏하면 남편은 폭력을 휘둘렀고 결국에는 이혼하게 되었다.

영심이는 임신 중이던 뱃속의 아이를 없애려고 수술을 받다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영일의 어머니도 몇 달 안 되어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영일은 이런 일을 계기로 북한 사회에 침을 뱉고 탈출하게 되었다. 여동생과 어머니의 잇따른 죽음으로 그는 ‘북한의 간부들’이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

한국 성인 TV방송에 절망한 친구

우리가 산속에서 지낸 지 한 달이 지나 음력설을 맞게 되었다. 나무를 실으러 왔던 주인이 우리더러 음력설은 자기네 집에서 보내자며 차에 타라고 했다. 산속에 숨어 짐승 같은 생활을 하던 우리에겐 꿈같은 일이었다.

주인은 큰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아내는 홍콩에 돈벌이를 가고 딸은 연길(延吉)에서 공부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주인집에 있던 한국 위성TV였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TV를 통해 한국을 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어 모두 술에 취했을 때 주인이 갑자기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 섹스영화 본 일 있어?”

영일이는 흠칫 놀라며 ‘그런 것은 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호기심이 생긴 나는 한번 보자고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은 한국 TV의 성인영화 채널을 틀었다. 우리를 아연케 한 사실은 성인영화를 몰래 비디오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인 TV방송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이런 TV가 성인인증을 받아야 시청할 수 있는 것인 줄은 몰랐다. 남조선에서는 TV만 켜면 아무나 성인방송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처음 그런 것을 보니 나도 어지간히 당황했다. 영일이는 말없이 독한 술을 연거푸 마셨다. 집주인은 친구의 전화를 받자 우리만 집에 남겨 놓은 채 나가 버렸다. 우리 둘만 남게 되자 영일이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경민아, 나 지금 집으로 돌아갈래”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남조선이라는 곳이 저렇게 썩은 땅이었구나. 북조선에서 하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어”

그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했다.

“저런 땅에 가려고 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여동생으로 인해 가슴에 큰 상처를 안고 있던 영일이는 붙들고 말리는 나를 남겨놓고 끝내 그날 밤 떠났다. 눈바람이 부는 텅 빈 밤길을 울면서 떠나던 영일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여동생의 죽음이 얼마나 가슴 아팠으면, 그렇게 증오하던 땅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됐을까. 그의 심정을 지금도 이해한다.

나는 그때 왜 그런 영화를 보자고 졸랐을까?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말할 수 없는 후회감과 씁쓸함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미안하다…. 지금은 어디서 살아 있기나 한지…. 보고 싶다, 친구야.

그때는 나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너에게 말해주고 싶다.

대한민국은 그때 너와 함께 본 그런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잘못 알았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박경민(2003년 탈북·33세 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