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유래했지만 더 악랄해진 北수용소 실체

북한 수용소 제도의 설립자는 소련의 고려인 방학세(方學世)였다고 할 수 있다. 소련 검찰국 출신 방학세는 소련 수용소 제도를 잘 알았고, 북한의 내무성과 수용소를 설립할 때 소련의 경험을 접목하였다. 따라서 현재 북한 수용소 제도는 소련과 공통점이 많다고 할 만하다. 필자는 이번 칼럼을 통해 이를 분석하려고 한다.

소련 수용소에서는 정치범과 일반범의 분리 없었다

북한 수용소 제도의 핵심적인 특징 중에 하나는 일반범·정치범 분리다. 일반적으로 살인, 절도 등 일반 범죄를 지었던 자들은 교화소, 정치범은 관리소에 수감된다. 하지만 스탈린 시대에 그런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악명이 높은 형법 58조에 따라 징벌을 받았던 정치범들도 일반 범죄자들과 함께 교화소에 보냈다. 단, 특히 1930년대 말기에 스탈린 정권은 ‘정치범에게 더 심한 노역을 시켜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치범’의 신분이 ‘일반범’보다 나빠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 차이는 없었다. 그들은 결국 같이 있었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거의 서로 접근할 수 없었던 범죄인과 지식인·군인 등 정치범들은 그렇게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현재 러시아 표준어에 원래 범죄인만 사용했던 단어들을 포함한 이유를 여기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교화소와 관리소 제도의 기원을 소련에서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북한의 교화소 제도나 관리소(정치범 수용소) 제도가 소련으로부터 차용됐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교화소의 공식 이름이 ‘노동교화소’, 관리소의 정식 이름이 ‘이주민관리소’라는 점에서 이 같은 사실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특히 1920년대에 소련은 ‘우리 진보적인 사회주의 나라에 범죄인을 수감시키지 않고, 대신하여 노동으로 재교육시키고 다시 사회인이 되도록 준비시킨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소련 수용소를 ‘노동교화소’(Исправительно-трудовые лагеря)라고 불렀고, 수감자들에게 필수적으로 노역을 시켰다. 즉, 소련 수용소에서 수감은 금고형이 아니라 징역형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 이 수용소 제도는 거의 변화 없이 북한에 차용되었다. 리준하의 ‘교화소 이야기’와 같은 북한 교화소에 대한 증언들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등 소련 수용소에 대한 증언과 비교하면 북한 교화소의 수감자 생활이 스탈린 시대 소련 수용소와 놀라운 정도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주민 관리소의 원천은 소련의 유형(流刑)에서 찾을 수 있다. 1920년에 전(前) 사회혁명당, 멘셰비키당 등 볼셰비키 당에 반대한 조직 소속이었던 사람들을 시베리아에 유형시켰고, 1920년대 말기에 ‘부농 계급 말살’ 운동 당시에 부농(富農)과 부농의 가족들에 대한 대규모 유형이 있었다. 김일성 시대 수감자의 가족까지 징벌을 시키는 제도의 기원을 바로 여기에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소련과 달리 북한에서는 완전 임의 탄압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김일성의 제도를 스탈린 제도보다 더 탄압적이었다고 본다. 김일성의 북한 주민 통제가 소련보다 더 강했지만, 한편, 스탈린 시대 소련과 비교하면 북한 제도의 한 가지 장점을 찾을 수 있다.

소련 대숙청(1937-38년) 때 탄압은 임의적이었다. 즉, 아무 범죄가 없는 사람을 체포하고 수용소에 보내곤 했다. 당시 죄 없는 소련 국민 수십만 명이 사형을 받았고, 수백만 명이 수용소에 끌려갔다.

스탈린의 소련과 달리 북한에 완전히 임의적 탄압은 없었다. 대신, 징벌은 매우 불공평했다. 김일성의 초상화를 훼손하거나, 김정일에 대한 농담을 하는 ‘죄’로 사람을 사형시키거나 무기징역을 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는다.

무기징역과 사형제도

소련의 수용소 제도에서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에 하나는 무기 징역이 없다는 것이다. 소련 형법에 따라, 최고형은(스탈린 시대에 ‘최고 사회 보호 조치’라는 미칭(美稱)을 사용했다) 사형이었고, 그 다음이 무기징역이나 무기금고가 아니라, 징역 25년이었다. 북한 형법은 소련과 달리 ‘무기로동교화형’이 있다.

게다가, 1947부터 1950년까지, 즉, 3년동안 소련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됐었다. 이와 달리 북한은 1948년 건국부터 현재까지 사형제도가 존재하며 집행되고 있다.

내무군

북한엔 특별한 무장 조직인 내무군이 있다. 사회주의권에 내무군은 곧 ‘비밀 경찰 소속 군대’였고, 정규군과 공통점이 많았지만 반드시 일치된 것은 아니었다. 내무군은 수용소 경비대, 국경 경비대 그리고 중요공장이나 철도를 지키는 경비대로 나누었다. 북한도 내무군 임무는 비슷하다.

북한 제15관리소(함경남도 요덕)에 수감됐던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의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는 공식적으로 조선인민경비대 소속 부대였다. 필자는 이에 대한 가설을 붙여본다. 수용소 경비대도 군경 경비대도 같은 조선인민경비대 소속 부대였기 때문에 관리소가 경비대 부대로 등록되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법정의 권한 외의 판결

소련에서도 북한과 같이 법정의 권한 외의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있었다. 스탈린 시대의 경우 이런 판결은 경찰 및 비밀 경찰 최고급 간부 5명으로 설립한 내무인민위원회 특별위원회가 내렸다. 특별위원회는 사형까지 판결을 내릴 권리가 있었고, 스탈린의 사망 이후 수집한 통계에 따르면, 소련 국민 1만 101명이 내무인민위원회 특별위원회 결정에 따라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특별위원회 모임에 피고인 또는 피고인의 대표자가 참석할 수 없었던 것 물론, 위원들은 일반적으로 토론 없이 피고인들에게 내리는 판결의 목록에 서명하였다.

북한의 경우, 관리소 유형은 법정의 권한 외로, 즉 보위부 결정에 따라 진행된다. 그러나,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소련과 달리 사형 판결을 재판소만 내릴 수 있다. 물론, 정치적 재판의 경우에 아주 큰 차이가 없지만, 이 문제에서도 스탈린의 제도와 김일성 제도가 일치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수용소를 연구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수감 경험자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탈북민과 만나 끔찍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스탈린이나 김일성에게 희생자가 된 사람들을 위하여 수용소를 연구하고 그 실체를 폭로하는 건 우리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