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김정남 암살 용의자, 외교관·항공사 직원? 당연 위장한 것”

북한 김정남 피살 사건에 연루된 북한 국적 용의자들의 ‘역할’이 베일을 벗고 있다. 특히 외교관이나 항공사 직원, 연구원 등으로 파악된 일부 북한 국적 용의자들이 모든 인적사항을 위장한 채 이번 암살 작전을 지원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범행 배후로 지목되는 북한 정찰총국의 공작 방식으로 볼 때, 평양으로 돌아간 리지현·홍송학·오종길·리재남과 범행 직후 체포된 리정철,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은신 중인 현광성·김욱일·리지우가 각각 개별 임무를 띤 채 파견돼 현장서 유기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김동식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前북한공작원)은 27일 바른정당 하태경 의원실이 주최한 세미나 ‘김정남 암살과 북한테러 대응’에 참석, “공작원들은 해외 파견 시 이름부터 생년월일 등 모든 인적사항을 위조한다”면서 “외교관 신분이나 공무여권을 갖고 파견된 사람 중 실제 해당 업무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공작 부서에서 파견했다면 모두 가짜”라고 지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이어 “용의자로 지목된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도 위장 신분일 수 있다”면서 “이들이 말레이시아에 나와 있는 공작원들을 현지에서 지도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관측했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과거 중국 대사관에도 북한 노동당 대외연락부에서 파견한 대중(對中) 공작과 부과장 등 공작원들이 상주해 있었다. 통상 북한에선 외교관들이라 해도 공작원들을 함부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사관에 위장 신분으로 파견된 공작원들은 권한이 매우 막강했다는 설명이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도 “북한은 고위급 공작원뿐만 아니라 외교관들도 신원을 위장할 때가 많다. 리수용 전 북한 외무상도 스위스에서 대사로 지낼 당시 여권 이름을 ‘리철’로 했었다”면서 “말레이시아 2등 서기관이라는 현광성도 당연히 가명일 것”이라고 말했다.

유 원장은 이어 “(현광성과 김욱일이) 암살 작전 자체를 지원했다기보다는 신속한 도피 등 측면 지원 역할을 했을 것”이라면서 “암살 작전 자체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해외 정보국 요원들만 아는 것이기 때문에, 현광성도 자세한 내막을 잘 알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암살 작전의 총책은 오종길(55·혹은 오정길)로 좁혀지고 있다. 유 원장은 “오종길은 정찰총국 해외정보국 부국장으로 추정된다”면서 “사전에 입수한 정보대로 김정남이 2월 6일 말레이시아에 입국하자, 이를 최종 확인하고 다음날 입국해 암살 작전을 총 지휘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리재남도 암살 작전 검열책 이상의 임무를 띄고 파견된 것이라고 유 원장은 분석했다. 유 원장은 “암살작전 검열 공작원격인 리재남이 정찰총국 정치국 간부라면, 실제 암살 작전 총책인 오종길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자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연구위원도 “리재남이 현장을 지휘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평양으로 돌아간 30대 용의자 홍송학과 리지현은 정찰국 암살요원으로, 여성 용의자들이 김정남 암살에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한 ‘암살 대기조’라는 분석도 나왔다. 실제 이들은 베트남·인도네시아 국적의 여성 용의자들이 김정남을 암살할 당시, 약 50m 떨어진 지점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유 원장은 “김정은 1호 지령을 기필코 성사시켜야 하기에 북한 작전요원들은 현지 고용인의 암살 시도 실패를 대비했을 것”이라면서 “만약의 경우 2차 암살을 통해 일단 대상자(김정남)을 제거하고 신속히 도주하거나 수사 기관에 체포될 경우 자결할 계획이 상정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도 “여성 용의자들은 예행연습은 했을지언정 전문 교육을 받은 공작원이라 보기 어렵다”면서 “이들이 암살에 실패할 확률이 50%는 됐기 때문에, 실패를 대비해 2차 공격을 가할 요원들이 범행 현장서 10~20m 떨어진 곳에 대기 중이었던 것으로 본다”고 관측했다.

그는 특히 “이 요원들은 김정남이 공항 응급센터를 찾아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 도주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유 원장도 “요원들은 김정남 몸에 독극물이 퍼지는 시간까지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을 것”이라면서 “김정남이 응급센터에 들어갔다가 들것에 실려 나오는 것까지 확인 후 출국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에서 체포된 리정철도 공작을 사전에 준비하는 핵심 역할을 맡았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일각에선 리정철이 도주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됐다는 점, 진술 중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리정철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고 보고 있으나, 전문가들은 리정철이 현지에서 공작 포석을 깔아놓는 요원이었을 것이라 분석했다.

유 원장은 “북한은 암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남아에 파견된 현지공작원 등을 통해 김정남의 동선을 지속 파악했을 것”이라면서 “그러던 중 무비자 입국 등이 가능한 말레이시아를 가장 유력한 작전지로 택하고, 지난해 8월 6일 리정철을 사전 파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리정철은 2명의 현지 여성을 포섭하는 것부터 북한에서 직파된 공작원 4명 호텔 안내, 차량 지원, 작전계획 작성 등을 맡은 핵심 실무 준비자”라면서 “리정철이 범행 직후 도주하지 않은 건 사건 연루자로 지목되는 것을 피하고 후속 조치를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