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집 사장님 김지현씨 “통일 후 고향에 남한 떡 소개하고파”

“북한에서는 아무리 기술과 열정이 있어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가 없었죠. 하지만 한국에서는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꼼수를 부리지 말고 당당하게 한국사회에서 살아갔으면 합니다. 욕심을 너무 부리지 말고 노력을 이어나간다면 성공적인 정착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현재 서울시 마포구에서 떡 케이크 전문점 ‘청진복떡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지현(사진) 씨는 탈북민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김 씨는 떡집 창업 전엔 전국을 돌며 공장 부품 조립, 식당 주방일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남한사회 정착 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휴업수당 미지급, 법적근로시간 초과 강요, 실업급여 편취 등 고용주의 횡포로 힘든 시절을 보낸 적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남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홀로 탈북해 불안정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어엿한 떡집 사장이 됐다. 김 씨는 (사)통일미디어(남북하나재단 후원)가 주관한 ‘통일전문기자 저널리즘 아카데미’에 참여한 학생들을 만나 “이제야 작은 결실을 맺은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김 씨가 밝힌 성공적 정착의 비결은 분명한 목표와 꾸준한 실천. 그는 떡집 창업 결심 이후 1년 여간 직장 생활과 떡 케이크 수강을 병행했다. 고비도 있었지만 차별화된 떡을 만들겠다는 의지 하나로 꿈을 향해 나아갔다.

현재 그는 북한에서 어머니가 가르쳐주시던 그대로 떡을 만들고 있다. ‘이게 떡이 맛있는 이유냐’는 질문에 김 씨는 “내 가족이 먹는다’는 심정으로 떡을 빚는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기분이 떡에 그대로 전달된다고 생각한다”며 “매일 마음가짐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의 정직함과 정성 때문이었을까. 매출은 오르기 시작했다. 밤낮 없는 불규칙적인 생활에 힘이 들 법도 하지만 주문 전화를 받는 일부터, 고객 맞춤형 떡을 만드는 일까지 모두 손수하고 있다.

모든 과정은 직접, 혼자서…손님들 생각하며 떡을 만든다

김 씨는 북한에 있을 때도 음식을 만들었다. 남한 정착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떡집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창업 관련 정보가 부족했다. 또한 초기 창업비용도 부족했고, 신용등급 때문에 대출도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한 지인이 미소금융 제도를 소개해줬다. 그는 이 제도를 통해 가게 운영 방법과 인구밀도, 유동인구 조사 등 창업 관련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2015년 9월. 김 씨는 마침내 북한식(式) 떡 전문점 ‘청진복떡공방’을 열었다. 사장님이 됐지만, 그는 재료선택부터 포장까지 모든 일을 혼자서 한다. 인건비 절약 때문이다. 또한 특유의 떡 맛을 지키기 위한 의도도 있다. 때문에 김 씨는 예약주문을 받은 이후 떡 제작에 들어간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떡과는 맛에서 차이가 있다. 고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지키기 위해 수작업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떡집 운영이 처음부터 순탄한 건 아니었다. 5개월 정도 유동자금이 부족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단골손님이 생기면서 매출은 점점 늘어났다. 탈북민 뿐만 아니라 남한 사람도 자주 찾아왔다. 한 남한 단골손님은 “며느리가 떡 케이크 덕분에 순산했다”며 갓난아이의 100일 떡을 재차 주문하기도 했다. “떡 케익의 맛과 멋에 반했다”면서 감사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자영업자는 빨간 날에도 쉽지 않는 게 보통이다. 또한 매출 관련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김 씨는 “장사를 하며 받는 스트레스는 장사를 통해 푸는 편”이라며 “떡을 예쁘게 만들면서 맛있게 드실 고객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떡을 만들 때에 주로 음악을 들으면서 즐겁게 일한다”고 전했다.

“주문이 지속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임대료, 관리비 생각에 걱정되기도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적든 많든 주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감사한 일이죠. 다시 찾아주시는 고객님들 덕분에 힘이 납니다.”

탈북독거노인을 위한 떡 케이크 자원봉사…고향의 맛을 전하다

김 씨는 ‘청진복떡공방’을 운영하면서 자원봉사도 시작했다. 떡집 창업 이후 탈북독거노인을 위해 기념일 떡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것.

그는 “한 번은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독거노인들이 혼자서 쓸쓸히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여기 사는 사람도 이런데, 북한에서 혼자 오신 분들은 더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씨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 뿌듯함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봉사는 하고 싶다고 그냥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있어야 해요. 대상자 분들이 거부할 수 있고 사실 고려할 부분이 많죠. 때문에 좋은 기회에 좋은 일을 하게 되어 보람을 느낍니다.”

“통일시대엔 다양한 떡을 만들고 소개하고 싶어”

김 씨는 공방에 오븐기를 구비해 보다 다양한 떡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찹쌀 타르트’나 ‘치즈 쌀케익’ 등 신 메뉴 개발을 창업 담당자와 상의할 것이라는 계획도 전했다. 또 인터넷 마켓과 택배서비스 등을 이용, 젊은 층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다.

또한 김 씨는 “성실함과 열정이 있다면, 수강료를 받지 않고 떡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줄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쉬운 게 아닙니다. 레시피 그대로 한다 해도 맛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지런히, 또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어야 겠죠”라며 다른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통일이 되면 고향인 청진에 가서 한국의 떡을 소개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밝혔다. “북한과 남한의 떡은 만드는 방식도 차이가 날 뿐더러 모양도 다른 부분이 많다”며 “남북의 떡을 잘 융화해서 남북한 퓨전식 떡을 개발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김지현 씨와의 인터뷰 전문]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청진복떡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지현이라고 합니다. 1999년도에 탈북했고, 청진출신입니다.”

-북한에 계실 때는 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1989년도 졸업생입니다. 1988~1989년도 김일성의 방침이 농촌에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가라면 무조건 가야했고 농촌에는 1988년부터 갔습니다. 이때 농장으로 집단 진출했고 학교에서도 역시 농장으로 진출했습니다. 청년작업반이라는 곳에서 10년 동안 농사일을 했습니다. 고향이 청진이어서 채소를 청진시 상점들에 공급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때 사계절 배추, 남새(채소) 재배, 농장운영 등을 했습니다.”

-탈북 후 한국 사회 적응에 있어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는지요?

“북한에서 단신으로 왔는데 주말이 외로웠고 고향생각도 많이 났습니다. 뭐랄까. 쓸쓸했어요. 경상북도 구미에 처음 가서 보름 만에 일을 시작했습니다.

브로커 비용도 물어야하고 제3국에 중국에 애도 있으니까 애를 빨리 봐야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북한이탈주민 생계비는 6개월만 주기 때문에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구미공단에 있는 삼호전자에 정직원이 아닌 아르바이트로 핸드폰 조립을 했습니다. 이때 프레스 기계 3대를 담당했습니다. 일은 힘들지 않은데 정신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불량부품을 걸러내는 작업을 하는데 기계가 엄청 무서웠습니다. 손도 잘릴 수 있는 기계인데다 처음 회사생활을 하려니 두려움도 있고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6개월 정도 일했습니다. 일은 힘들었지만 회사는 전에 이북사람들을 채용한 경험이 있었고 옆에 있는 주변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줘서 이런 점은 괜찮았습니다. 일하고 있을 당시 북한이탈주민은 2명 정도 있었습니다. 이전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직원의 의견을 잘 들어주고 사장님이 중국으로 출장이 잦아 북한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 편안했습니다.”

-한국 정착 후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북한에서는 여기말로 말하면 급식소에서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북한은 자체에서 뽑아 일합니다. 이때 130여 명이 기숙사 생활을 했고 밥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5~6년 동안 했습니다. 이때부터 음식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여기 올 때 꿈은 돈을 벌어서 가게를 차리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일하면서 구미 여성인력 센터에서 요리사, 조리기능사를 무료로 모집하는 것을 봤습니다. 지원했는데 합격해 조리사 학원을 다녔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이 후 친구가 서울에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냉면집을 소개해줬습니다. 그래서 2010년에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떡집 운영하기 전에 식당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북한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주방장으로까지 일했지만 영업이 잘 안 돼 나오게 됐습니다. 이 후 서울에 있는 다른 취업 자리도 봤습니다. 그런데 중소기업은 생각했던 것 보다 봉급이 작았습니다. 그래서 이미 발 들인 식당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횟집에서 직원을 구하는 표지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에 교포냐고 물어보기에 북한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조선족이라고 보통 이야기 하지만 속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식당 근무시간은 보통 11시간 입니다. 그런데 저는 10시부터 10시까지 12시간씩 일했습니다. 일을 급하게 구하다 보니 일하기로 한 식당 주인은 어떤지, 주방 아줌마가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주방아줌마가 자주 바뀐다고 하더군요.

봉급을 받고 일하면 휴가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횟집은 휴가를 가면 봉급을 깎았습니다. 일당을 깎고서 봉급을 줬습니다. ‘이러는 게 관행인가’ 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4대 보험을 받고 일하는 것은 유급휴가라는 것이 있는 것인데 사장이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봉급을 깎았습니다. 4대보험 가입을 하면 일하면서 휴가, 여름휴가도 주고 명절에는 성과금도 있는데 그 당시엔 몰랐습니다.

횟집에서 3개월만 일했습니다. 횟집 사모는 불법이지만 6개월만 일하면 석달 치 실업고용 받을 수 있으니까 4대 보험 6달치를 내줄테니까 3달치를 실업급여가 나오면 주겠으니 통장을 달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다른 식당에서 일을 그만둔 후 실업급여를 받으려고 보니 고용보험 측에서 전에 실업급여를 탄 적이 있다고 금액을 감해서 준다고 통보했습니다. 다른 식당에서 3년을 일하고 이에 맞는 실업급여를 타야하는데 지역담당자가 이미 3달분을 탔기 때문에 삭감된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모르게 횟집 사장이 실업급여를 탄 것이었습니다. 순진해서 몰랐습니다. ‘돈이 안 나왔겠지’ 했는데 횟집에서 3달치를 받아간 것이었습니다. 횟집으로 전화해서 따졌더니 적반하장으로 줄 수 없다고 오히려 따졌습니다. 화도 나고 억울했습니다.”

-2015년 9월 떡집을 오픈하셨는데 ‘청진복떡공방’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청진이 고향입니다. 청진이라는 단어가 뜻이 좋아서 청진복떡공방이라 지었습니다. 공방이라는 것은 방앗간이 아니고 송편 빚기 등 수강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수가 큰 집에서 공방은 할 수 있지만 판매는 못합니다. 판매도 해야 했기 때문에 가게를 차렸습니다. 즉석식품이기 때문에 구청 위생과에 신고하고 가게를 차렸습니다.”

-‘쉼떡’과 ‘찹쌀꽈베기’가 가장 인기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떡을 맛있게 만드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혹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지요?

“떡마다 노하우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에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맛있는 떡이 나올 수 없습니다.

또, 음식을 매일 새로 만들기 때문에 그날그날의 기분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음가짐을 항상 바로잡고자 합니다. 기분이 떡에 그대로 전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떡집을 운영하신지 약 1년이 지났습니다. 떡 공방을 실질적으로 운영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지요?

“음식의 맛이나 고객서비스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운영상 중요한 점은 처음 창업을 할 때 생각했던 금액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보증금이라든지 공방 운영비가 계획과 많이 달랐습니다. 처음 5개월은 정말 고생했어요. 주문은 꾸준히 들어오는데도 계속 가게 살림을 갖추다 보니 임대료 내기도 힘들었습니다. 소소하게 필요한 것들이 어찌나 많던 지요. 집에서 공방을 석 달 정도 하면서 기본적인 기계들은 갖춘 상태에서도 이 정도였는데, 바로 창업으로 뛰어들었다면 훨씬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유동자금이 항상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더하자면 파트너십이랄까요. 남편이 가게 운영의 여러 부분을 도와주고 있고 배달 같은 것은 도맡아 해주고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같이 호흡을 맞춰서 하니까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도 물론 있습니다.”

-떡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은? 혹은 자부심은?

“장사를 할 때 절대 제 양심을 속이지 않습니다. 내가 먹어서 맛이 없으면 정말로 맛이 없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먹는다’는 혹은 ‘내 가족이 먹는다’는 심정으로 떡을 만들고 있습니다.”

공방을 연 이래로 다른 사람을 들이지 않고 혼자서 떡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힘이 들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욕심 부리지 않습니다.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객이 찾는 그 맛을 계속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쉽사리 맡길 수가 없습니다.”

-떡집 창업에 들어간 비용은 어느 정도인가요?

“보증금 1000만원 시설비 1000만원 해서 총 2000만원 들었습니다. 혼자 운영하기엔 딱 적당했습니다. 혼자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7월하고 8월은 떡집 비수기인데 사람을 쓰면 인건비가 나가고 비쌉니다. 혼자해서 힘들긴 하지만 부담은 없습니다.”

-다른 떡집과 차이점은요?

“떡 케이크는 주문을 받은 이후 제작에 들어갑니다. 보통 방앗간은 자기가 한 떡이 아니고 다 공장에서 오고, 바람떡(개피떡), 모찌(찹쌀떡) 등을 팩으로 배달 받아 판매합니다. 사실 떡집에서는 메인 떡 3가지 정도밖에 안 만듭니다. 저는 딱 주문만 받아서 손수 만듭니다.”

-홍보는 어떻게 하셨나요?

“카카오 스토리를 이용했습니다. 처음엔 집에서 공방운영을 3개월 정도 했습니다. 공방은 괜찮은데 판매는 위생법에 걸립니다. 그래서 가게를 차렸고 매출이 늘었습니다.”

-남북하나재단의 창업 컨설팅을 받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나 더 보완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요?

“대출을 받는 곳에서 우선적으로 컨설팅을 해주고, 매장의 위치 등이 통과돼야 대출이 되는 것입니다. 심사를 까다롭게 하기 때문에 저를 만나보고, 이 상가가 어떤지 등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인구밀도, 유동인구 등 여러 가지 조사를 했습니다.

남북하나재단에서도 대출을 해줬습니다. 사실 부끄럽지만 탈북자는 대출을 잘 안 갚습니다. 대출한 탈북자의 45%는 연체가 있다고 합니다. 대출받고 제3국으로 가는 경우도 있어서 남북하나재단에서도 대출을 잘 안 해줍니다. 그래서 열매재단 등을 통해 상담을 받았고 미소금융에다 물어봤습니다.”

-매출이나 운영에 만족하시는 편인지요?

“저축을 많이 할 정돈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매출이 좀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7, 8월은 떡집에겐 비수기입니다.

북한은 방앗간에서 줄서서 떡 재료를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북한 집에서 먹던 그대로, 어머니가 가르쳐주시던 그대로 만듭니다. 송편, 쉼떡(상아떡) 등 여러 가지 떡을 만들었었습니다. 지금 여기는 북한에서 쓰는 재료가 없습니다. 또, 언감자가루 같은 재료는 4만원 정도 단가가 비싸서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언감자떡 메뉴도 개발할 예정입니다.”

-떡케익 자원봉사를 통해 재능기부를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또 언제 보람을 느끼시는지요?

“처음 한국사회에 놀란 게 이웃사촌 문화가 많이 옅어진 것입니다. 옆집도 잘 모르고, 문 들어가면 끝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인사도 안하고…”
 
한번은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독거 노인분들이 혼자서 쓸쓸히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여기 사는 사람도 이런데, 북한에서 혼자 오신 분들은 더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탈북독거노인을 대상으로 생신 때마다 떡 케이크를 만들어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개업을 하면서 시작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 뿌듯함을 느낍니다. 자원봉사라는 것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고 사실 고려할 부분이 많습니다. 좋은 기회에 좋은 일을 하게 되어 보람을 느낍니다.”

-개업 후, 떡을 만드는 일 혹은 자원봉사를 할 때 등 힘들었던 점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가끔 떡을 가지고 ‘별로다’, ‘내가 먹던 떡과 다르다’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속이 많이 상합니다. 고객들에게 최선을 다해 떡을 만들었는데 말이죠. 최근에는 ‘두부 밥’을 가지고 너무 크다고 불만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원래 북한에서 먹는 것은 훨씬 클 뿐더러 주위 모든 사람들은 오히려 적당하다는데 말이죠.
 
잘못해서 그랬던 것도 아닌데 쓴 소리를 들으면 아무래도 힘이 듭니다. 장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종종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도 탈북민들 뿐만 아니라 남한 분들도 공방 단골이 생기고 다시 찾아주시는 손님들이 생기면서 뿌듯함도 느끼고 있습니다. 최근에 남양주 한 산모에게 떡 케이크를 배달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직접 전화를 주셔서는 며느리가 떡 케이크를 엄청 맛있게 먹고 순산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나중에 그 아기 100일 떡을 또 주문하시면서, 케익이 정말 곱고 떡 케익 맛에 홀딱 반했다면서 이야기를 주시니 너무 고마웠습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따로 있나요?
 
“스트레스 해소는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근데 머리는 많이 빠지는 것 같습니다. 병원에 가보라고 하는데 장사가 조금만 안 되면 신경이 쓰이고 주문이 없어도 신경이 쓰입니다.

저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데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것은 고객에게 일정부분 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능사가 아닙니다. 병원 환자가 3일 동안 밥을 한 끼도 못 먹었는데 제가 만든 떡이랑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고객이 액정이 깨진 핸드폰으로 깨진 사진을 찍어 카카오 스토리에 올려서 나보고 사기 쳤다고 했습니다. 정말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본인에게 전화를 걸어 따졌더니 미안하다면서 사진을 내렸습니다. 북한이탈주민이 주로 주문하는데 우리가 우리를 이해해 줘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택배 보냈는데 늦게 도착했다, 또는 전화를 못 받았다고 사기친다며 뭐라고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일하시면서 모임 등 참여하시나요?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도 주말이 없고 그러다보니 서로 시간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임도 못나가고 있어요. 대신 장사를 하며 받는 스트레스는 장사를 통해 푸는 편입니다. 떡을 예쁘게 만들면서 맛있게 드실 고객 분들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음악을 자주 듣습니다. 떡 만들 때도 음악을 켜두는데,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안재욱의 친구, 노사연의 만남입니다.”

-일이 끝나고 나면 주로 무엇을 하시는지요? 혹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하루를 마감할 때 주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내일 주문이 없으면 어쩌지 하고 근심을 합니다. 주문이 들어와야 하는데, 이어져야 할 텐데 항상 걱정입니다. 남편은 하루쯤 안 들어와도 된다. 왜 그렇게 걱정을 하느냐, 편하게 생각하라지만 임대료, 관리비 생각에 항상 부담감이 있습니다. 고정급이 아니라 주문이 들어 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적든 많든 주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떡은 우리민족 전통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통일 후 만들고 싶은 떡이 있나요?

“통일이 되면 고향 청진에 가서 남한의 떡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북한과 남한의 떡은 하는 방식도 차이가 있을 뿐더러 모양도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북한사람들도 한국식 떡을 못 봤을 테니까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또, 남북의 떡을 잘 융화해서 남북한 퓨전식 떡도 개발해보고 싶습니다. 통일 후에는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공동의 문화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향후 계획 및 개인적 목표가 있다면요?

“일단 현재 공방에 오븐기를 놓고 밀가루가 아닌 보다 다양한 떡을 만들 생각입니다. 또, 인터넷 마켓을 통해 택배로도 떡들을 팔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오븐기가 들어오면 찹쌀타르트라든지 치즈 쌀 케이크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데, 유통기한이 길기 때문에 포장해서 일반 택배로 갈 수 있습니다. 아직 계획서 준비는 안됐지만 창업담당자와 한번 상의해볼 생각입니다.

또 나중에는 예쁜 떡 카페를 차리고 싶습니다. 떡도 내놓고, 차도 함께 파는 그런 떡 카페로 확장됐으면 좋겠습니다.”

-만약에 다른 분이 선생님께 기술을 배우고 싶다든지, 같은 이름으로 체인점을 내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온다면요?

“체인점 까지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실함과 일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수강료 없이도 떡을 가르쳐 줄 의향은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공방의 이미지는 실추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 맛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쉬운 게 아닙니다. 제 레시피 그대로 한다 해도 맛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지런히, 또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어야겠죠.”

-이제 정착을 시작하는 탈북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북한에서는 자신이 아무리 기술이 있고 열정이 있어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탈북자들이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한국사회 내의 다양한 직업들을 통해 충분히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습니다. 꼼수를 부리지 말고 떳떳하게 한국사회에서 살아갔으면 합니다. 욕심 너무 부리지 말고 자신이 땀 흘린 만큼 정당하게 살고자하면 보다 안정적인 정착에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