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출신 北인권 운동가 “영원한 독재 없어”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한(恨)이 맺혔다고 할까. 당시 루마니아의 독재자였던 차우셰스쿠(Ceausescu) 독재체제를 바꿔놓을 수 있는 용기 있는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마음이 무거웠는데, 당시 루마니아와 너무나도 비슷한 체제인 북한을 보면서, 그곳에서 고생하고 있을 주민들을 위해서 이번만큼은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레그 스칼라튜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사진)을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을 위해 20년 가까이 헌신케 한 원천은 ‘한(恨)’이었다. 고국인 루마니아의 주민들이 차우셰스쿠(Ceausescu) 독재체제 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체제 변화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던 것이 젊은 날의 그에겐 일종의 부채(負債)였다.

루마니아의 독재체제가 몰락한 이후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우연히 오게 된 대한민국은 북한체제·북한인권을 접하게 되면서 또 다른 고향이 됐다. 북한이 루마니아와 너무나도 같다는 것을 알아가고 자신이 경험했던 이상의 억압이 북한 주민들에게 가해지고 있다는 점은 스칼라튜 총장이 북한인권운동가의 삶을 선택한 계기였다. 그는 최근 진행된 데일리NK·국민통일방송과의 공동 인터뷰에서 “아마도 루마니아에서 차우셰스쿠 정권이 유지되고 또한 제2의 권력세습까지 이뤄졌으면 루마니아는 북한과 이 세상에서 가장 비슷한 나라가 됐을 것”이라면서 두 사회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차우셰스쿠는 민족적 공산주의와 신 스탈린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1964~1989년 사이 25년간을 루마니아의 전제적 지배자로 군림했다. 특히 김정은이 ‘김일성 따라하기’를 통해 체제공고화를 도모했던 것처럼, 40년 전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을 따라하며 루마니아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1971년 북한을 방문하고 온 차우셰스쿠가 북한식 주체사상, 독재자에 대한 신격화를 루마니아에도 적용한 것이다. 개인숭배정책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운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생일은 물론 그의 부인 엘레나의 생일까지도 국경일로 지정했다. 권력은 이들에게 독점되어 있었고, 법적 절차는 제도가 부재하거나 결핍됐다.

공고할 것만 같았던 차우셰스쿠 체제가 위기를 맞은 것은 1980년대 말, 루마니아를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이 경험했던 경제적 위기 때문이었다. 불만이 폭증한 루마니아 민중은 ‘차우셰스쿠 물러나라’는 구호와 함께 공격적인 시위를 전개했고, 수천 명이 사살되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증오하던 억압적인 독재 정권을 타도하게 된다. 차우셰스쿠는 이에 놀라 피신하다가 체포됐고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날에 총살 처형됐다.

스칼라튜 총장은 30여 년간 차우셰스쿠의 독재체제를 지탱한 것은 비밀경찰 ‘세쿠리타테’라고 설명했다. 공식적으론 1만 4000명 정도로 추정되지만 비공식적으로 그 숫자를 가늠할 수조차 없이 많았던 비밀경찰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도청·사찰을 통해 차우셰스쿠의 독재체제를 보위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독재체제를 “어둡고 위험하고 미래·희망도 보이지 않는 사회였다”면서 “남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내게)밀고자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 남을 절대로 믿지 마라. 그리고 특히 학교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믿지 말라고 했다”면서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는가”라고 반문하며 독재체제의 참상을 폭로했다.

영원한 독재 없어北 변화 주체 주민들에게 외부세계가 정보 유입해야

그는 독재정권이 감시·폭력을 통해 주민들을 억압할 지라도 “영원한 독재체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북한 역시 변화할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루마니아가 주민들의 힘으로 차우셰스쿠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렸던 것처럼, 북한에서도 주민들이 북한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고 결국에는 김씨 일가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북한 주민들”이라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세계에서 힘과 도움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주민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알리고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스칼라튜 총장은 그 방법으로 외부정보 유입을 꼽았다. 그는 “독재체제 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루마니아 주민들도 미국의소리(VOA)방송, 자유유럽방송과 같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의식이 생겼다”면서 “정보에 접근할 권리가 차단되어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라디오 방송, USB 등을 통해 정보를 유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스칼라튜 총장은 북한 사회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억압적 사회분위기·가혹한 통제·처벌·감시 때문에, 사회통합 정도가 낮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의 동인을 찾기가 어렵다”면서 하지만 주민들 스스로 진실을 알게 되고 각성하게 된다면 북한 사회도 변화할 수 있고, 이는 사회 전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 또 인간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은 독재체제에서 살게 되면 이러한 체제가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루마니아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영원히 유지되는 독재체제는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정아 국민통일방송 아나운서(아래 사진 왼쪽)와 진행된 이번 그레그 스칼라튜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과의 대담은 최근 국민통일방송 단파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북한으로 송출됐다.

[다음은 그레그 스칼라튜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과의 인터뷰 전문]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직을 맡고 있다. 방송을 듣고 있을 북한의 청취자를 위해 북한인권위원회가 어떤 곳인지 간단히 소개해달라.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는 15년 전인 2001년도에 설립된 단체다. 북한인권위원회의 이사회는 미국 정부의 전직 고위관리에서부터 민간의 기업가·학자 등 북한인권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북한인권위원회가 설립될 무렵엔, 북한의 인권실태를 바탕으로 연구 하는 단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북한인권위원회가 설립된 것이고 우리의 임무는 북한의 인권실태를 조사하여 보고서를 발간, 이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동유럽의 공산주의 몰락 후 최초의 루마니아 국비장학생으로 한국에 건너와 10년 동안 살았고, 지금은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루마니아와 똑같은 공산주의권 국가였던 북한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고국인 루마니아 뿐 아니라 동구권과 구소련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북한도 자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다(물론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그러다가 대아사기인 이른바 ‘고난의 행군’ 때부터 북한의 인권실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 루마니아와 북한이 많은 부분이 다르긴 했지만 유사한 점이 너무나 많았고 더 알아보고 싶어서 연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북한과 상황이 비슷한)루마니아에서 태어나 20년을 살았고, 분단된 한반도에 와서 10년을 살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자연히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말한 것처럼 루마니아도 북한처럼 혹독한 독재체제였다. 혁명에 의해 독재체제가 무너졌을 때까지 루마니아 주민들도 북한 주민들처럼 많은 억압을 받았을 것 같다. 어떤 생활을 경험했고, 그 당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독재체제는 주민들을 통제, 탄압하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루마니아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의 루마니아는 억압적이고 어두운 나라였다. 상당히 힘들었다. 특히 남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항상 하셨던 말씀은 “밀고자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 남을 절대로 믿지 마라. 그리고 특히 학교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믿지 말라”였다.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는가.

-루마니아 대통령이었던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김일성을 모델로 삼아 루마니아를 통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처럼 루마니아도 감시가 심했을 것 같은데?

그렇다. 차우셰스쿠는 1971년에 북한을 처음 방문하고 루마니아를 북한과 비슷한 나라로 바꿔 놓으려고 했다. 북한식 주체사상, 독재자에 대한 신(神)격화를 루마니아에도 적용한 것이다. 이 무렵 이후 차우셰스쿠는 주민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고,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Bucureşti)를 평양과 비슷한 도시로 바꿔놓으려고도 했다. 또한 차우셰스쿠는 해외로부터 많은 돈을 빌리기도 했다. 수만 명 앞에서 연설 하고 주민들이 박수를 치면서 독재자를 숭배하는 분위기를 좋아했는데, 이를 위해 돈이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빌려온 돈은 주로 주민들의 삶 개선과는 무관한 웅장한 도로·커다란 건물들을 건설하는데 쓰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차우셰스쿠는 주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루마니아 비밀경찰을 활용했다. 당시 루마니아 주민들은 미국의소리(VOA)방송, 자유유럽방송과 같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차우셰스쿠의 행적과 외부 세계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세쿠리타테’라고 불렸던 비밀경찰 등을 통해서 주민들의 행동을 감시한 것이다. 비밀경찰은 공식적으론 14,000명 정도로 추정되지만 비공식적으로 그 숫자를 가늠할 수조차 없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당시 루마니아 주민들은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으로)국가적 망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 루마니아의 인구는 2300만 명 정도였고 그 중 50만 명 정도는 밀고자였다. 루마니아 사회를 회고하자면 상당히 어둡고 위험하고 미래·희망도 보이지 않는 사회였다.

-결국 독재체제가 붕괴됐다. 그리고 차우셰스쿠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까지 당했다. 당시 어떤 생각이 들었나?

그 당시에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루마니아 사람들이 기뻐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차우셰스쿠도 자신이 억압하고 처형당했던 사람들처럼 법적인 절차 없이 사형 당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비록 법적인 절차를 지키지 못했지만 (오히려)그 상황 속에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사람들이 용감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독재자를 제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수만 명, 수십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을지도 모른다. 또한 차우셰스쿠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루마니아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 명의 최고지도자가 몇 십 년 동안 절대적인 주도권을 잡고 있다면, 그 최고 지도자를 제거해야 반체제 혁명이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차우셰스쿠 독재체제가 붕괴된 이유가 궁금하다. 무엇이 루마니아 주민들이 혁명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결국은 독재체제를 붕괴시켰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북한 주민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루마니아 주민들은 머리 숙이며 참다가 폭발하는 스타일이다. 독재와 억압에 대한 폭발이 체재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루마니아는 특히 1970-80년대에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앞서 말한 차우셰스쿠의 외채가 문제가 됐다. 당시 그는 ‘루마니아식 주체’를 주민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 감당할 수 없는 많은 돈을 빌렸고, 이를 갚아야 했기 때문에 수출 일변도 정책을 펴게 된다(물론 산업화 달성을 위한 자금 충족 목적도 있었다). 모든 것을 수출하고 수입을 차단시켰다고 보면 된다. 주민들이 먹을 식료품, 곡식까지 모두 수출을 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먹을 식량이 없었고 심지어 북한식 배급제와 유사한 ‘량권’제도까지 생겨나게 됐다. 이렇게 되니까, 주민들은 몇 시간씩 줄을 서서 필요한 생활필수품·식량을 살 수 밖에 없었고 전력이 공급되지 않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은 외채를 갚긴 했다. 물론 주민들의 생활은 결코 향상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희망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의 다음 행동이 그 희망을 빼앗았다. 차우셰스쿠가 리비아의 독재자였던 카다피 등 다른 독재자들과 함께 공산권 국가들을 위한 ‘은행’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공산주의권의 독재자들은 서구권의 자유민주주의국가들이 설립한 ‘세계은행’과 경쟁하기 위해서 설립될 은행에 많은 돈을 투자, 이를 통해 독재체제를 지탱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주민들의 심정은 암담했다. 주민들을 억압하면서 차우셰스쿠 자신의 개인숭배를 위해서 돈을 낭비하는 것이 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결국 희망은 분노로 바뀌어 폭발한 것이다. 또 주변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루마니아 사람들도 체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은 마지막까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의 북한체제를 보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과거 독재체제였던 루마니아와 비교해 본다면?

1980년대 말까지 루마니아와 북한은 상당히 비슷했다. 아마도 루마니아에서 차우셰스쿠 정권이 유지되고 또한 제2의 권력세습까지 이루어졌으면 루마니아는 북한과 이 세상에서 가장 비슷한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마니아 사례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독재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절대독재체제에서 살고 있으면 독재가 영원할 것이라 생각 할 수 있지만, 과거 루마니아 사례를 통해 100%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독재가 영원할 순 없다.

-북한인권위원회가 파악한 북한인권 실태는 어떤가?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변화의 징조가 관측되는가?

북한의 인권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북중 국경지대의 통제가 심해졌고, 그로 인해 탈북자 수가 많이 감소했다. 2011년도까지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1년에 약 2800여명 정도 됐는데 김정일 사망 이후 반으로 줄어들었다. 1년에 1천 500명 정도 내외로 줄어든 셈이다. 또한 북한의 정치범 관리소가 확장됐다. 북한 당국은 국경지대에 가까이 있던 구금시설 등은 닫아버렸고 내륙에 있는 정치범 관리소를 확장시켰다. 14호·25관리소 등이 많이 확장됐다.

-북한 당국이 북한주민들에게 자행하는 인권유린 행위 중에서 ‘알 권리’ ‘정보접근권’을 제한하는 것도 큰 문제로 지적된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알 권리’를 북한 주민들은 어느 정도 보장받고 있는가?

하나도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사실 북한은 인권 가입국으로서 유엔인권선언이라든가 다른 국제 법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 또한 북한의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을 모두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북한 주민들은 이조차 잘 알고 있지 못하다. 이것이 북한의 현실이고, 북한 주민들에게 알권리와 정보의 자유 등이 필요한 이유다.

-북한주민들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해, 외부사회의 지원이 필요하단 주장도 나온다. 북한주민들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해서, 외부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북한을 바꿔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남한주민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북한 주민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외부세계)가 이들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정보전달이다. 알권리 보장·정보의 자유를 위해서 라디오 방송·USB 제공 등 여러 수단을 통해서 북한 주민들에게 정보를 전달 해 줘야 한다. 전달해 줘야 하는 정보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인권에 대해 설명해 줘야 한다. 북한 주민들은 인권이란 개념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으로서 북한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인권이 무엇인지, 또한 북한 주민으로서 북한 헌법에 의해 보장받을 수 있는 인권이 무엇인지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줘야 한다. 둘째, 대한민국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전달해 줘야 한다. 북한의 비공식적인 시장화에 의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졌지만 북한은 아직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나라다. 외부세계, 특히 번영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전달해 줘야 한다. 셋째, 김씨 일가를 비롯한 북한 고위층의 부정부패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줘야 한다. 이 세 가지 방향으로 정보를 전달해주면 그만큼 북한 주민들의 의식을 높일 수 있고, 북한을 긍정적 방향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진실’을 알게 된다는 것은 ‘각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진실을 알게 된 북한 주민들이 각성해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보는가?

북한 사회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억압적 사회분위기·가혹한 통제·처벌·감시 때문에, 사회통합 정도가 낮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의 동인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주민들 스스로 진실을 알게 되고 각성하게 된다면 북한 사회도 변화할 수 있고, 이는 사회 전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긍정적 의식이 생기고 사회통합 정도도 높아진다면, 사회를 긍정적인 길로 이끌어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인권위원회에서도 북한 주민들의 ‘알 권리 보장’ ‘정보 자유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향후 어떤 계획이 있나?

북한인권위원회의 역할은 북한(주민)의 실태를 조사하여 보고서를 발행하고 이 결과를 미 의회를 포함한 유엔 산하 기관·세계 각 국의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북한인권과 관련한 중요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국제사회의 일부 정부·언론만이 이를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누구보다도 봐야 할 분들이 바로 북한 주민들이다. 현재는 북한 주민들에게 보고서 내용을 압축시켜 알릴 수 있는 방안을 국제사회와 함께 고민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조차 북한인권문제, 통일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솔직히 신기하다. 북한주민들의 인권을 개선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개인적인 이유지만, 루마니아에 살면서 폭력·독재체제를 바꿔놓을 수 있는 행동을 하지 못했다. 물론 루마니아서 체제가 바뀌려고 했던 마지막 순간에는 혁명에 참여했지만 그 전에는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혹은 겁이 나서였는지 모르지만 용기 있는 행동을 하지 못했다. 한국에선 한(恨)이 맺혔다고 표현하듯이, 마음이 무거웠다. 그 당시 차우셰스쿠 정권 시기에 한(恨)이 맺혔기 때문에 루마니아와 유사한 사회에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대해 관심이 많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또한 남북한 주민들을 위해서도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남북한 주민의 운명이 통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북한을 통일시키려면 북한 정권의 정체성을 바꿔놓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인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이유로 북한인권 운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강조했지만 독재는 영원할 수 없다.

국민통일방송이 제작한 그레그 스칼라튜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과의 인터뷰 영상./영상=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