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빨치산 가문 숙청 시 되레 ‘역풍’ 맞을 것”

북한 최고위급 외교관의 망명으로 북한에선 또 한 번 숙청의 바람이 불까. 한국으로 귀순한 태영호 전(前)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와 부인 오혜선이 빨치산 혈통이라고 알려진 가운데, 북한에 남아 있는 친인척들이 자칫 김정은식(式) 공포정치의 희생양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김정은이 최고위급 간부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관계자는 물론 친인척들에게까지 ‘연좌제’를 엄격하게 적용, 잔혹한 처벌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태영호·오혜선 가문 역시 김의 숙청을 벗어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특히 ‘빨치산 혈통’은 김일성 집권 시기부터 ‘백두혈통’을 보위해온 만큼, 김정은이 그 어느 때보다 이번 ‘망명 사태’에 크게 분노해 강도 높은 책임 추궁을 할 것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군 간부 출신의 한 고위 탈북민은 18일 데일리NK에 “최근 김정은이 탈북민 가족에 대한 연좌제 처벌 수위를 낮췄다고는 하지만, 태영호는 일반 주민도 아니고 한 나라를 대표하던 공사였지 않나”라면서 “북한에 남아 있는 직계 가족은 물론 친인척까지 숙청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 탈북민은 “김정은도 외국에 나가 있는 북한 고위직들이 대북 제재의 현실을 절감, 자칫 이탈하진 않을까 늘 촉각을 곤두세워 왔기 때문에 태영호의 망명은 그 무엇보다도 충격적일 것”이라면서 “따라서 다른 외교관들이나 고위층 간부들이 태영호의 망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본보기 차원에서 친인척들에 강한 처벌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태영호의 친인척들에 대한 보복성 숙청이 오히려 체제 균열이라는 ‘역풍’만 가져올 것이란 관측도 만만찮다. 빨치산 혈통이 ‘김정은 체계’ 곳곳에서 주요직을 맡고 있는 만큼 갑작스런 숙청은 권력 구조에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 또 장기간 세력을 확장해온 빨치산 혈통들이 김정은의 무자비한 숙청에 반기를 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태영호의 형 태형철은 현재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활동 중이며, 오혜선 일가 중에도 오금철 북한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 주요 요직에 빨치산 출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만큼, 김정은도 태영호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숙청을 단행하긴 어려울 것”이라면서 “책임 추궁 차원에서 징계를 내릴 수는 있겠지만, 이른바 ‘유혈 숙청’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단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조 연구위원은 이어 “아예 가혹하게 처벌해 추가 이탈을 막으려 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도 있지만, 오히려 빨치산 세대를 건드렸다가 역풍을 맞아 체제 균열이 더 가속화될 수 있다”면서 “빨치산 혈통은 생각보다 두텁고, 극단적인 경우 김정은에 반기를 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김광인 코리아선진화연대 소장도 “친인척들이 마냥 무사하진 않겠지만, 처벌 수위가 숙청까지 갈 것이라 내다보긴 어렵다. 빨치산 혈통의 상징성을 김정은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오히려 태영호 망명 사실이 내부적으로 알려지면 (추가 이탈 등)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친인척들에 대한 후속 조치도 공개적으로 이뤄지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위 탈북민도 “일반 주민들 역시 공포정치를 보며 충성심은커녕 반발감만 높아져 있는 상태인데, 김정은이 또 다시 대대적인 숙청을 자행하면 민심 이반은 가속화될 것”이라면서 “공포정치로 야기할 수 있는 ‘공포’에도 한도가 있다. 일정 수준을 넘으면 ‘공포’가 ‘분노’로 바뀌어 결국엔 폭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김정은을 ‘인권 범죄자’로 지정하는 등 북한인권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공론화되는 상황이 김정은의 인권 유린을 억지하는 효과로 작용할 것이란 견해도 있다. 국제사회의 제재 명단에 올라 우상화에도 빨간불이 켜진 상황에서, 외부 압박이 거세질 만한 극단적인 선택은 되도록 피하려 들 것이라는 설명이다.

조 연구위원은 “장성택 처형 이후 김정은은 대내외에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돼 버리지 않았나. 지나친 숙청은 역풍이 될 수 있다는 걸 김정은도 알 것”이라면서 “장성택 처형 이후에도 고위층에 대한 숙청이 몇 번 있었던 걸로 알지만, 되도록 은밀히 진행하려고 한 걸 보면 외부의 ‘인권 압박’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자칫 김정은이 친인척 및 관계자들을 숙청하지 않도록 외부에서 ‘인권 압박 정책’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특히 우리 정부가 태영호 귀순 사실을 공개적으로 확인한 만큼 태영호뿐만 아니라 북한에 남아 있는 친인척들에 대한 보호책임도 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북한 전문가는 “앞으로 태영호는 물론 북한에 있는 친인척들이 자칫 숙청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비극적인 일이 초래된 후 사후 조치를 취할 게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김정은이 함부로 인권 유린을 자행하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압박을 넣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