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김정은, 미얀마 민주화 보고 어떤 생각할까?

미얀마 군사정권이 독재정치로 일관해 오다가 최근 민주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온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이 총선에서 대승리를 거둔 건데요. 그동안 독재정권에 시달려왔던 미얀마 국민들이 더 이상 못살겠다, 한번 바꿔보자라는 민주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17일 이 시간에는 미얀마의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한 의미와 아직도 민주화의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북한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 나오셨습니다.

1. 원장님, 최근 미얀마에서 열렸던 총선을 통해 무려 53년 동안 이어졌던 군사정권이 무너졌습니다. 먼저 이에 대한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아직 완전히 붕괴된 건 아니고 내년 3월정도 돼야 전모가 들어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상황으로 보면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사실상 정권을 이양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주의민족동맹이 상하원 총 657석 중에서 약 364석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53년간 이어졌던 미얀마의 군부독재가 무너지는 역사적인 순간이 됐습니다. 이를 위해 미얀마 민중과 수치 여사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많은 희생이 뒤따르는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미얀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갈 길이 멀고, 이제 시작이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얀마 민중은 순조롭게 모든 문제들이 풀릴 때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2. 그동안 미얀마를 이끌어왔던 군부 독재 권력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미얀마는 1948년 1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독립해서 자기들 나름대로 국가를 건설하려는 상황에서 1962년 네 윈(1910~2002)장군이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독재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이 군사독재도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자본주의를 하면서 군사독재를 할 수 있고, 사회주의를 하면서 군사독재를 할 수 있는데 미얀마는 사회주의로 군사독재를 하게 됩니다. 그 당시 미얀마는 자연자원이 많고 먹을 것도 풍족해 굉장히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군부독재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못 먹고 못살고 탄압받는 상황이 됐습니다. 주민들은 불만은 가졌지만 군부독재의 강경한 통제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이 연속됐었습니다. 그러나 1988년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미얀마 국민들은 민주화 운동에 하게 됐고 군부와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많은 희생을 했지만 민주화를 이루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3. 그동안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 온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평가도 빼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수치 여사는 위대한 사람이죠. 그의 아버지가 아웅산이라고 하는 미얀마의 영웅인데 이때 당시 미얀마는 영국과 독립·무장투쟁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투쟁을 통해 영국을 몰아냈고, 이때 아웅산이 일본과 손을 잡고 힘을 합쳐 영국을 몰아내고, 또다시 일본까지 몰아낸 굉장한 전략가입니다. 때문에 아웅산은 미얀마의 건국의 아버지로 불렸는데 아웅산은 불행하게도 독립을 이룬 2년 후에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미얀마는 비극이 시작되죠. 수치여사는 아웅산 장군의 딸로 1945년에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죽고 나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영국과 인도를 전전하다가 영국인과 결혼해서 자식 두 명을 낳습니다.

수치 여사는 아버지가 정치를 하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1988년 4월 어머니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간호할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미얀마로 돌아가게 됩니다. 수치 여사가 미얀마에서 어머니를 간호하고 있는 사이에 미얀마에서는 그 유명한 ‘8888항쟁’이 일어납니다. 1988년 8월8일8시에 랑군(現양곤)이라고 하는 곳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 것이었는데 이때 엄청난 사람이 죽어요. 약 4천명 이상이 군부의 강압적인 무력진압에 의해 죽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미얀마 국민들은 굴하지 않고 더욱 저항을 하게 되고, 국민들은 못된 군부를 누군가는 혼내줘야 된다고 하지만 군부를 손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때 마침 수치여사가 미얀마에 들어와 있었죠. 아웅산이라는 국부의 딸이 나서서 군부를 나무라게 되면 군부가 꼼짝하지 못할 것 아닌가 하는 말들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군부는 독재를 하고 있었지만 아웅산에 대한 존경심은 굉장히 컸기 때문이죠. 아웅산은 미얀마 군부에서 위대한 군인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에 수치 여사가 마침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며 나서게 되는 것이죠. 이때부터 수치 여사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수치 여사의 수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연설 때문에 미얀마 군부는 수치 여사를 감금하고, 1989년부터 감금형을 해서 수치 여사는 2010년까지 가택연금을 당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게 됩니다.

수치 여사의 별명은 ‘강인한 공작새’입니다. 얼굴을 보면 굉장히 강인하게 생기셨잖아요. 공작새를 닮았다고 해서도 그렇고,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미얀마 국민들이 공작새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시위를 했는데 수치 여사도 공작새와 비슷하게 생겨서 강인한 공작새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미얀마에서 굉장히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국은 대통령까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미얀마 현재 헌법에 의하면 수치 여사는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헌법에 외국인 남편이 있다든가 외국국적의 자녀가 있으면 미얀마의 대통령이 될 수 없어요. 헌법 개정을 해야 수치 여사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데 헌법 개정이 잘 돼서 수치여사가 대통령까지 했으면 좋겠습니다.

4. 다만 수치 여사의 세력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아직 공식적인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수치 여사는 25년 전에도 총선에서 승리했었지만 당시에는 군사정권이 승복하지 않고 지금까지 권력을 유지해 왔었는데요. 이번에는 어떤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예상하시나요?

지금까지는 좋은 것 같습니다. 육군참모총장도 축하전화를 했고, 미얀마 테인 세인(Thein Sein) 대통령도 권력이양을 순조롭게 하겠다고 대내외적으로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선거가 지난 11월 8일이었고, 11월 16일 의회 첫 회의가 있었는데 여기에 수치 여사도 함께 참석을 했습니다.

세인 대통령은 군부 강경파 출신입니다. 그는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민주투사들을 죽이기는 했지만, 2011년 국가의 형태가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거든요. 이에 따라 미얀마도 굉장히 개혁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2011년 말부터 세인 대통령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개방적인 국가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다만 현재 세인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어 앞으로 수치 여사와 정치적 경쟁관계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현재까지는 순조로운 것으로 보입니다.

5. 상황을 보면 미얀마에도 이제는 민주주의 싹이 트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요. 하지만 그동안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얻기까지 어떤 난관이 있었고, 어떻게 극복해 왔었는지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독립이후 쿠데타가 일어나고 군부정부가 1962년에 들어섰고 미얀마가 사회주의로 들어오면서 엄청난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1988년 학생폭동이 일어났고 약 4천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때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수치 여사가 미얀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수치 여사는 군부에 저항하는 선두에 서게 되고, 이때부터 민주화 시위가 계속됐습니다. 

군부정권이 수치 여사에게 가택연금을 내려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수치 여사는 미얀마의 정신적인 상징이 되어 많은 민중인사들에게 힘을 실어줬습니다. 또한 수치 여사가 가택연금이 있었지만 그 안에서 내보내는 여러 가지 메시지를 통해 민주화 시위를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군부는 쉽게 변하지 않죠. 아무리 민주화 시위를 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군부인데 군부가 마침 오판을 한 번 했습니다. 1990년 5월에 총선을 했었는데 (앞서 25년 전에 수치 여사가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군부가 인정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한 것이 1990년 5월 총선입니다) 그때 군부가 총선을 왜 실시했냐하면 개혁적인 방법들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않을까 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충분히 민주화 세력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을 한 거죠. 그러나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이 85%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습니다. 군부는 깜짝 놀라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거무효 선언을 해버리죠. 그래서 다시 독재로 회기하게 됩니다.

한편 수치 여사는 민주화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인물이 됐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미얀마의 군부 탄압은 계속됐지만 국제적 압력, 유엔이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미얀마에 정치적 압력뿐 아니라 경제적인 압력을 계속 가했습니다.

또한 미얀마는 비록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주변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밖에 없었어요. 자원도 팔아야 하고, 중국이나 인도 등 이웃국가들에게 물건을 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국가와의 소통이나 주변국과의 정보교류협력은 가능했고, 조금씩 통제는 받았지만 여행도 가능했습니다. 아무튼 이런 난관들을 거치고 국제적인 압력을 통해서 수치 여사가 2010년 가택연금에서 풀려나오고, 2012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도 됩니다. 2013년에는 방한을 해서 광주의 민주화 현장을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난관을 거치면서 미얀마는 민주주의의 싹을 트는 쾌거를 이룬 것인데,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죠. 앞으로 민주화 과정을 실천하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결정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 이제는 민주주의 세력이 평화롭고 강력한 국가를 세우기 위한 과제만이 남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가장 신경 써야 한다고 보십니까?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수치 여사가 해낼 것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안정과 국민 화해라고 정리할 수 있겠는데요. 일단은 민주화 과정에서 탄압받은 사건들에 대해서 진상규명도 하고, 책임자 처벌도 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얀마에서 그 대상은 군부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군부는 실질적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 선거에서 참패를 했습니다만 미얀마의 실질적인 파워 엘리트들과 기득권 세력들은 군부거나 군부와 결탁한 세력들이기 때문이죠. 이 진상규명을 하다보면 현재 살아있는 핵심 권력들이 연루돼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엄청난 반발이 있을 것이거든요. 물론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얀마 의회는 상·하원 중 군부가 25%를 자동적으로 차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군부를 지지하는 정당이 소수이긴 하지만 의원들이 이끌어야 되거든요. 또한 헌법에 보면 중요정책에 대해서는 군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돼 있고, 군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난관, 반발이 있을지 모르고 그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우여곡절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프랑스 혁명 때도 한 번의 혁명으로 모든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혁명, 반혁명이 계속 됐었거든요. 미얀마도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수치 여사의 리더십이 정말 중요한 때 인 것 같습니다.

또한 국민 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얀마에 소수민족이 많아서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거든요. 역사적으로 미얀마 군부는 소수민족을 얼마나 많이 제압을 했느냐에 따라서 위대한 장군이 될 수 있고 안 될 수도 있을 정도로 소수민족이 많아요. 미얀마는 앞으로 어떻게 소수민족과 융화하느냐가 제일 큰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종교 갈등도 심각합니다. 미얀마 국민의 80%가 불교긴 하지만 이슬람교 기독교도 있기 때문이죠.

앞으로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미얀마를 두고 미국과 중국의 갈등도 심합니다. 서로 미얀마를 차지하려는 것이죠. 미국은 2010년부터 굉장히 공을 많이 들였어요. 수치 여사도 미국에 가서 오바마 대통령도 만나고 했었습니다. 또한 중국도 미얀마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렇듯 미-중간의 갈등이 클 텐데 이 외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미얀마는 중립외교를 할 것 같습니다만 이 외교를 잘 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굉장히 과제가 많을 것 같습니다.

7. 미얀마는 북한과 비교적 친한 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미얀마에 민주주의 세력이 집권하는 것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에 열중하는 북한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보시나요?

미얀마와 북한은 굉장히 가깝죠. 특히 군사적으로 가깝습니다.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이 있었어요. 그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관료들을 암살하려는 테러가 있었고, 다행히 전 대통령은 살았지만 우리 고위 관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이것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밝혀지면서 1984년 11월 4일 북한과 미얀마는 단교합니다. 그러나 한참후인 2007년 4월 중국이 중재를 해서 수교를 합니다. 그 이후 북한과 미얀마 간에는 무기거래가 굉장히 활발해져요. 여기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들은 굉장한 압력을 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미얀마는 굉장히 친한 사이인데 미얀마는 세습정권은 아니죠. 또한 수치 여사를 살려줬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처럼 간부를 죽이거나 하는 것처럼 악랄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미얀마와 완전히 다르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과연 북한이 미얀마의 민주화 과정을 보면서 마음을 바꿀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한다든가 좀 더 개방적으로 나갔을 때 미얀마처럼 반대세력이 집권하게 되면 자기들은 다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거든요. 북한은 미얀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고 죽였기 때문에 보다 더 개방적으로 나가기보다는 움츠러들지 않을까, 더 폐쇄적으로 나가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때문에 북한에 대해서 우리가 전략을 잘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민주화가 돼도 김 씨 패밀리를 재판을 통해서 척결하고 진상규명도 하고 처벌을 해야 되지만 대부분의 파워엘리트들은 상관없다, 김 씨 패밀리들의 책임이지 파워 엘리트들은 상관없다는 식의 안심전략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북한이 미얀마 민주화 과정을 보면서 우리도 저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 좋은데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