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반대’로 1석 4조 효과 본 중국

최근 한미중 간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논란이 거세다. 시나브로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런 고도의 전략개발 무기 전문가가 된 것일까? 국가 안보의 문제가 이렇게 투명(?)하게 논의되는 것이 민주사회의 장점일까? 이런 민주사회가 일사분란한 사회주의 중국이나 철권통치의 북한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요구될까?
 
언제부터인가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되는 것이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서란다. 모든 것을 알아야 진정 사회에 대해 깨어있는 것이고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증진에 기여라도 하듯이 말이다. 사드 방어체계는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미래의 무기이며, 핵미사일 공격을 막겠다는 꿈의 이상을 구현하는 걸 목표로 한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중국과 미국에 끼인 한국이 찾아낸 절묘한 전략이 바로 3NO(No request, No consultation, No decision)였다. ‘모호함’이라는 그 자체가 전략인 경우다. 항상 궁지로 몰릴 때는 상대가 “나는 네가 지난 여름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다”고 말할 때이다. 모호함이란 의중과 진실을 감추기 위한 연막(veil)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참 투명한 대한민국은 ‘연막’이 문제라고 천하에 알리고 있다. 언론은 기세 좋게 연막을 벗기라고 가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호함은 우유부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동북아 안보지형도에서 기정사실화한 한 가지는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20년 간 비핵화 협상의 실패는 어떤 무능한 정권이나 어리석은 지도자 한 사람의 탓이 아니다. 군사적 핵 무장의 의지를 꺾을 당근은 없다. 강제적인 포기를 불러올 채찍도 없었다. 사드는 그 고육지책의 산물이다. 그것도 21세기 첨단 테크놀로지가 막대한 자본과 결합해 만들어 낸 창조적인 발명품이다. 아직 세상에 나오려면 갈 길이 멀었지만 이론적으로 검증된 상품이란 거다.


민항기는 보통 고도 10킬로미터 상공에서 비행한다. 그보다 열 배 이상 높은 곳에서 시속 6천 킬로미터로 날아가는 폭이 1미터 남짓, 길이 15미터 정도의 로켓을 맞춘다는 발상이라니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물건 아닌가. 과연 명중시킬 수 있는 거 맞나?


휴전협정 이후 60년 이상 대한민국은 한 번도 이 땅에서 전쟁하지 않는 군대를 애써 유지해 오고 있다. 앞으로 이 군대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런데 왜 이 군대를 유지하고 있을까? 싸우지 않는 군대를 훈련시키는 까닭은 저 먼 낯선 땅으로 전쟁하러 내보내기 위함일까? 어리석은 질문을 굳이 한 이유는 한번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다.
 
사드는 군대의 부속품일 따름이다. 살수도 있고 안 살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살지 말지 결정하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니다. 사든 안 사든 그 행위 자체는 대단히 중요한 전략이 된다는 점이다. 중국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 이유도 실은 그 때문이다. 내(중국)가 알지 못하는 전략을 상대(한국)가 갖는 것 자체가 나(중국)의 전략적 이익의 상실을 의미한다.
 
사드 논란의 본질은 사드를 구매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그 결정 자체를 ‘할 수 있다’는 물리적 가능성 자체에 있다. 어떤 결정을 했는지 상대가 알지 못하는 모호성을 유지할 수만 있었다면 전략적 가치는 더 높아졌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이고 국가고 타인이나 타국에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그 결과 자기의 이익과 입지를 강화하려는 본질적 본능이 있다.
 
그럴 계제만 주어진다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것이 사람과 국가다. 게다가 국가란 사람보다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행위자다. 이 좋은 먹이감을 두고 중국과 러시아가 침묵할 리 만무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국가이익 앞에서 국가가 취하는 ‘말 바꾸기’는 예사로운 일이다. 한국의 사드 논란에 중국이 끼어드는 일은 중국으로선 1석 4조의 효과가 있으니 한국의 맨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 미국을 향한 적당한 견제구가 된다. 가뜩이나 아시아중시 정책을 표방한 미국이 떨떠름하고, 그래서 태평양을 반분하자는 등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치었는데 한국이 아시아에서 미국의 입김을 제어해줄 훌륭한 명분을 제공해줬는데 기쁘지 아니할까. 어차피 일본은 중국 얘기를 귀담아 들을 상대가 아니다.
 
둘째, 북한에 대한 영향력 확대다. 사드문제에 관해 북중이 협의했다는 공식발표나 징후는 없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북한이 중국에게 ‘순망치한’의 필요성이 있다면 북한에게 중국은 미국을 우회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지렛대이다. 북한으로선 중국이 더 절실해지는 대목이다.


셋째, 한국을 궁지로 몰아 전략적 모호성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이미 현실화됐다. 이제 한국은 공개적으로 구매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낮은 전략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사드를 들여와도, 들여오지 않아도, 한국은 중국에게 중요한 카드 하나를 잃어버린 셈이다. 


넷째, 아시아의 맹주는 중국임을 동북아 국가들에게 암묵적으로 선포하는 효과가 있다. 북핵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중국이 미국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안보 이슈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니 미국의 동맹국이나 친미적인 국가들로서는 계속해서 중국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상황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카드를 상실하게 되자 한국은 이제 한참 아래 수준인 전략적 명확성의 단계로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들어가게 됐다. 정치인들은 제각기 떠들기 시작했다. ‘자중지란’의 형국이다.


‘명확성’이란 하나를 버리는 기회비용의 크기를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상황이다. 이 덕에 한국으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실체적 근거는 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대중(對中)부담을 지게 됐다. 누구의 탓인가. 정치인? 언론? 미국? 중국? 북한? 그냥 세계질서 속 힘없는 한국의 자화상? 사드 논란의 공론화 속에 정작 북핵문제는 가리워지고 한국의 안보상황만 고스란히 드러나 버린 2015년, 정부는 외교 시험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