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후 체제통합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독일통일은 서독 기본법 제23조(기본법의 적용지역)에 따라 동독 5개 주가 서독 연방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제통합 과정도 서독의 법 체제를 동독지역에 이식하는 과정이었다. 구체적인 통합작업은 1990년 7월 1일 발효된 『화폐·경제·사회 통합조약』과 1990년 8월 31일 체결된 통일조약에 따라 이루어졌다.

『화폐·경제·사회 통합조약』에서는 경제 및 사회 분야의 통합방법 및 통합절차를 상세히 규정하고 있는 반면, 『통일조약』에서는 각 분야별 통합원칙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특히 부속의정서에서는 특별한 이유로 서독법의 적용을 일정기간 유예하는 서독법 조문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통일독일의 체제통합 과정은 큰 갈등 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분단 시 동독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데다, 동독지역 행정체제 재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서독출신 공직자들의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세부 업무추진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화폐·경제·사회 통합조약과 통일조약 내용

『화폐·경제·사회 통합조약』은 6장 38조의 본문과 부속의정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폐통합, 경제통합, 사회통합, 국가예산과 재정 등에 관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화폐통합과 관련해서는 동서독 화폐의 교환비율에 관한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고, 경제통합과 관련해서는 동유럽경제권(COMECON)과의 관계, 내독교역, 대외경제, 기업의 구조조정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사회통합 부분에서는 노동법과 사회보험·실업보험·연금보험·의료보험·산재보험 등 5대 보험의 통합절차를, 국가예산과 재정 부분에서는 재정정책의 기본원칙, 기채 제한, 서독의 재정 보전액, 조세 등과 관련된 통합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통일조약은 9장 45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속의정서를 포함하면 200쪽에 달한다. 통일조약에는 ①1990년 10월 3일 동독 5개주가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가입한다는 것, ②통일독일의 수도는 베를린이라는 것, ③10월 3일은 독일통일의 날로서 법정 공휴일로 한다는 것, ④서독법률 가운데 개정, 폐지 및 신규 제정할 법률과 동독법 가운데 계속 적용되는 법률 내용, ⑤국제조약과 협정 처리방법, ⑥행정 및 사법통합, ⑦공공재산과 채무처리 방법, ⑧노동·사회보장·가족·여성보건·환경보호·문화·교육·과학·체육 분야의 통합방법 등을 규정하고 있다. 부속의정서에는 일정기간 동독지역에서의 적용이 유예되는 서독법 조문들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런 조항들은 동독주민들에게 서독제도에의 적응기간을 주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단기간에 이렇게 세부적인 부분까지 통일조약에 포함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서독 법 규정의 차이점을 숙지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치분야 통합

정치통합은 동서독 정당 간의 통합, 신연방주 주 의회 의원 선거 및 연방하원의원 선거를 통해 이루어졌다. 통일 후 취해진 정치통합을 위한 첫 번째 조치는 1990년 10월 4일 베를린 제국의사당에서 전독일 연방하원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하원의원 총 663명 가운데 144명은 구동독 출신 의원이었으며 로타 드메지어 전 동독 총리 등 구동독 정치인 5명이 연방정부의 무임소장관으로 입각했다.

동서독 간의 정당통합은 1990년 3월 18일 동독 자유선거 시 협력했던 동서독 자매정당들이 통일 후 통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자매정당이 없거나 새로 구성된 정당은 단독으로 각종 선거에 참여했다. 구동독은 중앙집권 체제여서 주 의회가 없었기 때문에 통일 후 신연방 5개주에 주 의회를 구성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통일 직후인 10월 14일 실시된 주 의회 선거에서 기민당이 4개주에서 집권했고 사민당은 1개주에서 집권했다.

1990년 12월 2일에는 1933년 이후 처음으로 전 독일에서 연방하원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기민/기사당(CDU/CSU) 43.8%, 사민당(SPD) 33.5%, 자민당(FDP) 11%, 연방90/녹색연합(B’90/Grune) 5.1%, 구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은 2.4%를 각각 획득했다. 민사당은 총 득표율이 법적 하한선인 3%에 미달했으나 베를린에서 지역구 의석 4석을 확보하여 연방의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대외관계의 재정립 

통일독일의 대외관계도 새로이 정립되었다. 1990년 9월 12일 조인된 『독일관계의 최종결정에 관한조약』(2+4조약)에 따라 통일독일은 주권을 완전히 회복했으며, 동독이 제3국과 체결한 조약은 당사국들과 협의하여 존속, 조정 및 효력 상실 여부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통일 당시 동독이 체결하고 있던 3,093건의 국제조약 가운데 85% 정도가 통일과 동시에 효력을 상실했고 450여 개의 조약은 관련국가와의 협의를 통해 점차적으로 정리되었다.

통일 당시 구동독은 채권 74억 마르크, 채무 386억 마르크를 갖고 있었는데 그 중 동독정부와 공공기관의 채권·채무는 독일 수출입은행 등이, 민간기업의 채권·채무는 45개의 대외무역회사가 청산작업을 담당했다. 제3세계와 동구권 국가들에 대한 채권행사는 경제상황과 개혁과정 등을 감안하여 신축성 있게 처리했다. 동독이 맺고 있던 외교관계는 통일과 동시에 소멸되었으며 구동독의 외교공관은 통일독일이 인수했다. 4,000여 명에 달하던 구동독 외무성 직원 중 외교관은 전원 해임되었고, 기술분야 종사자 250여 명만 한시적으로 근무하다가 그 중 일부는 추후 정식으로 임명받았다. 해임된 외교관 중 468명이 재임용 신청을 했으나 어학특기자 80여 명만 채용되었다.

행정 및 사법 통합

행정 및 사법 통합은 동독의 행정체계를 개편하고 서독법률 5,500여 개를 동독지역에 이식하는 작업이었다. 통일 후 신연방 5개주에 연방 및 주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서독법률을 모두 동독지역에 적용하되 일부 조항은 3~5년간, 혹은 그 이상 기간 동안 적용을 유예하도록 했다.

동독 행정체제의 개편을 위해 통일 직후부터 “연방 및 주 행정 조직정비처”를 설치하여 1,000여 개의 동독 중앙행정기구를 재정비했으며, 연방 내무부는 “신연방주 재건단”을 운영하여 지방자치단체의 행정문제와 부동산 문제 자문, 인력알선 지원, “동독재건 공동대책”에 따른 사업을 지원했다. 행정인력의 충원을 위해 구동독 공직자 약 200만 명을 재심사하여 국가보안부(Stasi) 근무 및 협조 경력 등 특별히 결격사유가 없는 인원 140여만 명을 재임용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연방 및 구서독 주 정부가 공무원, 판사, 군인, 근로자, 연금생활자 등 35,000여 명을 신연방주에 파견하여 행정체제 정착을 돕도록 하는 한편, 동독 공직자에 대한 대대적인 교육훈련과 연수 활동을 지원토록 했다.

통일조약 체결과정에서 동독 측은 동독 법률을 당분간 유지하면서 예외적인 경우에만 서독법을 적용할 것을 주장했으나 거부되었다. 동독지역 법체계는 서독 기본법, 유럽공동체(EC)법, 연방법, 주법의 순서로 개편되도록 되었다. 사법조직의 개편도 신속히 이루어졌다. 통일 직후 동독의 최고 법원과 대검찰청이 폐지되고 계류 중인 사건은 일반법원, 행정법원, 노동법원 등 해당 연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판·검사는 통일조약에 따라 동독의 자격을 인정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신청자에 대한 심사과정을 거친 후 재임용되었다. 구동독에는 판사 1,500명, 검사 1,300명, 변호사 600명이 있었는데 판·검사 2,800명 가운데 1,889명이 신청하여 1,094명(58%)만 재임용되었다. 통일 후 신연방주에는 판사 3,417명, 검사 1,162명 및 법무행정직 282명이 배치되었다. 1994년 말 현재 판사들은 동독출신 18%, 서독 신규 채용자 51%, 서독 각주 파견자 24%로 구성되어 있으며, 검사의 경우 33%는 동독출신, 45%는 서독 신규 채용자, 17%는 서독 각주 파견자로 충원되어 있었다.

통합과정에 대한 평가

통일 후 체제통합 작업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①통일과정이 동독주민들의 자유의사가 반영된 가운데 합법적, 평화적으로 이루어져 갈등요인이 적었고, ②과거 서독 공무원들이 오랫동안 동독과의 교류·협력 업무를 담당해 오는 동안 동독 법률과 실정에 정통한 데다, 민간연구소 등에도 전문가가 많았고, ③통일이 가시화되기 전인 1990년 2월 콜 총리 지시에 따라 총리실 산하에 6개 분야의 통일 준비팀을 구성하고 준비를 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서독법규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①서독체제의 결함에 대한 신중한 재검토 없이 체제이식이 이루어져 서독 행정체제의 문제점이 신연방주에서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던 점, ②서독 출신 인력들이 고위 행정직을 독차지하여 동독출신자들의 불만을 샀다는 점, ③서독에서 지원된 인력들이 별로 우수하지 않은 데다 사전교육이나 준비 없이 파견되어 초기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 ④동·서독 출신 행정인력 간에 불신, 편견, 이질감이 심했다는 점, ⑤신연방주의 재정자립도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