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왜 독일통일을 수락하게 되었는가?

독일통일 직전까지 소련은 독일통일을 가장 바라지 않는 나라로 인식되어 왔다. 2차 대전 당시 2,000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던 악몽이 생생한 데다 강력해진 독일은 항상 소련에 위협이었고, 동독은 소련의 최일선 방어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련이 독일통일을 수락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➀고르바초프의 신사고(New Thinking) 외교노선 때문이라는 해석, ➁서독의 동방정책과 화해정책이 거둔 성과라는 해석, ➂서독이 소련에 막대한 경제지원을 하여 “돈으로 통일을 산 것”이라는 주장 등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소련의 태도변화 과정을 보면, 당초 소련은 동독의 소멸이나 독일통일을 용인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독일통일이 가시화된 후에도 독일통일을 방해 또는 지연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경제사정 악화로 국제정세 관리능력이 현저히 약화된 데다 서방측이 미국을 중심으로 확고히 단결하여 소련을 압박했기 때문에 독일통일을 불가피하게 승인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콜-고르바초프 간의 인간적 신뢰, 고르바초프 서독방문시 서독국민들의 환대, 그리고 서독의 대규모 경제지원이 소련의 태도변화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냉전시기에 이런 요인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 사항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동독에 대한 소련의 태도


동독은 소련에게 매우 귀중한 존재였다. 정치·군사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키는 최일선 방어선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소련 원자재를 비싸게 사주면서 선박, 산업설비, 생필품 등을 값싸게 공급해 주는 코메콘(COMECON) 경제체제의 핵심국가였으며, 연간 48억 마르크(약 30억 달러)에 달하는 소련군 주둔비용의 70%(약 21억 달러)를 부담하는 핵심우방이었다.


더욱이 사회주의 최고의 선진 복지국가로 소위 사회주의의 업적을 대표하는 동독이 망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의 패배를 의미했다. 따라서 소련이 동독 공산정권의 몰락과 독일통일을 수락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소련이 동독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하기는 했지만 동독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 하거나 독일통일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 지도자들도 독일통일에 반대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전후의 소련의 태도


베를린장벽 붕괴 전후 기간 동안의 소련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10월 31일 소련을 방문한 에곤 크렌츠 동독 서기장이 시위대가 베를린장벽으로 몰려가는 사태로 번질 경우 강경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을 때 주저 없이 동의했다. 11월 6일 고르바초프는 동독주재 소련대사 코체마소프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와서 동독을 잃는다면 우리 인민들이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소련 외무부 대변인의 공식발표는 “국경개방 결정은 동독의 주권행위이며 이주에 관한 새로운 규정은 현명하다”는 내용이었고 소련 관영 타스통신도 “동독은 더 이상 세계와 단절되지 않은 세계를 향해 열린 국가”라는 등 예상 밖의 온건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첫 반응이었을 뿐 그 후 소련의 반응은 거의 공황상태에 가까웠다.


11월 10일 고르바초프는 콜 총리에게 메시지를 보내 통일논의로 동독을 흔들지 말 것을 경고하고 콜이 나서서 군중을 진정시키고 혼란을 예방하라고 요구했다. 미국 등 다른 서방국가 지도자들에게는 서독에서의 “정치적 극단주의”를 비방하는 서한을 보냈다.


쉐바르드나제 외무장관도 미국, 프랑스, 영국에 서신을 보내 “감당하지 못할 결과”를 초래할지 모를 “무질서한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 즉각 4강회의를 소집하자고 요구했다. 1989년 11월 28일 콜 총리가 발표한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에 대해서도 “세계에는 두 개의 독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콜 총리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때까지의 소련의 정책은 동독의 소멸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으며 동독에 대한 서독의 우호적인 태도에 거는 기대가 컸다. 콜 정부가 평소 공언한 대로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하여 동독을 안정시키고 주민탈출을 막는데 협조하면서 경제지원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동독과 소련은 서독의 개혁요구를 일부 수용하면서 사회주의의 ‘질서 있는 개혁’을 추진하여 시위사태를 진정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콜 정부가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통일을 추진하자 전략수정이 불가피해졌으며, 그 후 소련의 정책은 독일통일 가능성은 수긍하되 프랑스 및 영국 등과 협조하여 통일독일을 중립화하거나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는데 주력하게 된다.


독일의 중립화 및 독일통일 지연을 위한 노력들


1989년 12월 3일 동독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총사퇴, 호네커 등 전직 고위간부의 사회주의통일당으로부터의 제명, 12월 5일 호네커의 연금, 12월 6일 크렌츠의 국가평의회 의장직 사임 등 동독 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소련은 통일독일을 중립화하거나 프랑스, 영국과 협조하여 동독의 멸망과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태도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통일반대에서 시작하여 점차 통일독일의 중립화, 통일독일의 NATO 탈퇴, NATO 영역의 동독지역 확대 금지, 조건 없는 독일통일의 수락으로 조금씩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 12월 3일 고르바초프는 부시대통령과의 말타회담에서 두 개 독일의 존재를 인위적으로 변경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고, 12월 6일 키에프에서 회동한 고르바초프와 미테랑은 서독의 일방적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어서 12월 10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고르바초프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의 국내 사태에 개입치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도 유럽의 안정을 위해 동독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독일통일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통일독일의 NATO 잔류문제 등을 쟁점화하여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려 했다. 12월 19일 NATO 사령부를 방문한 쉐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급격한 독일통일에 반대하면서 소련은 통일독일의 중립화를 구상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고르바초프는 2월 10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콜 총리와의 회담에서 독일통일의 시기와 방법은 독일인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라고 하면서도 독일통일은 유럽 및 동서 관계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조건을 붙였다.


쉐바르드나제는 3월 18일 프라하에서 개최된 바르샤바조약기구 외무장관 회의에서 독일통일은 독일민족이 결정할 사항이라는 점을 재확인하면서도 소련은 통일독일의 중립화를 고수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1990년 3월 18일 동독 자유선거에서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승리하고, 4월 20일 부시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이 2차 대전 전승국가의 권리포기에 합의한 후 소련의 태도는 더욱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4월 6일 미국을 방문한 쉐바르드나제는 종래의 독일 중립화 주장은 철회하고 NATO 잔류에만 반대했으며, 4월 11일 NATO 기관지 기고문에서는 통일독일은 과도기간 중 NATO 및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동시 회원국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어 5월 2일 동서독이 『화폐·경제·사회통합조약』을 체결한 후에는 5월 5일 개최된 제1차 2+4 회담에서 독일통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도 통일 후 일정기간 동안 4강이 권한을 유지토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6월 22일 개최된 제2차 2+4 회담에서는 통일독일의 동·서 동맹체제 동시가입 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소련은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는 것 보다는 경제지원을 얻는데 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7월 16일 코커서스에서 개최된 독·소 정상회담에서 소련은 서독 및 서방측이 제시한 모든 조건들을 수락함으로써 독일통일의 대외적 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태도는 한 사람은 강경하고 다른 사람은 유연하며, 오늘 제안한 내용을 내일에는 철회하는 식으로 태도에 일관성이 없어 소련의 진의가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동독 내 상황과 국제정세가 워낙 빠르게 변한 데다, 소련내부에서 강경세력과 온건세력 간의 견해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임시 변통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서독이 소련의 약점을 간파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해 나갔기 때문에 소련은 미국과 서독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끌려가면서 한발 한발 양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