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을 위해 콜 총리는 어떤 노력을 했는가?

콜 총리는 2차 대전 이후 서독에서 정치인들의 통일논의가 금기시 되던 시기에 1989년 9월 이후 동독주민의 시위사태가 ‘통일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과감한 노력으로 국내외 정세변화를 통일로 연결시켜 나갔다.


콜 총리의 조치내용을 시기별로 ➀동독혁명 과정에서의 역할, ➁통일 추진 과정에서의 역할, ➂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승인을 얻는 과정에서의 역할 등으로 구분하여 살펴본다.


동독 평화혁명 과정에서의 역할


첫째, 헝가리와의 비밀교섭 등을 통해 동독주민의 대량탈출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 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 철조망을 제거하자 매일 수백 명의 동독주민들이 헝가리를 통해 탈출하기 시작했다. 동독 정부의 항의를 받은 헝가리 정부가 동독과의 여행협정에 따라 동독주민들을 체포, 동독으로 송환하자 콜 총리는 1989년 8월 25일 네메트 헝가리 총리와의 비밀교섭을 통해 5억 마르크의 차관제공, 비자면제, 헝가리의 유럽연합 가입 지원 등을 약속하고 헝가리의 여행협정 파기약속을 받아냈다.


그 해 9월 동독인들이 체코 및 폴란드 주재 서독 대사관에 진입하여 서독행을 요구했을 때는 소련, 동독과 교섭하여 9월 30일부터 10월 4일간 총 13,990여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출국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탈출 열풍을 확산시켰다.


둘째, 콜 총리는 대부분의 동서독 지식인들이 동독의 존속을 희망하면서 통일에 반대하고 있을 때 적극적인 노력으로 동독 시위사태를 통일로 연결시켜 나갔다. 1989년 9월 기민당의 브레멘 전당대회에서는 “공산주의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며 하나의 독일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왔다”고 선언했다.


정부 내에서도 겐셔 외무장관은 독일국민들 사이에서 통일 논의가 일어나는 것을 잠재우려고 노력했으나 콜 총리는 달랐다. 10월 들어 동독 내 시위가 격화되자 10월 21일 콜 총리는 “동유럽 민주화는 독일통일의 기회를 의미한다”고 언급하는 등 통일열기를 부추기는데 노력했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 서독이 동독의 불안정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고르바초프의 경고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동의를 표시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동독 주민들의 통일열망을 계속 부추겨 나갔다. 11월 13일 취임한 동독 모드로우 총리가 제시한 조약공동체 통일방안이 통일압력을 희석시키려는 기만작전이라는 점을 간파하면서도 이에 호응한 것 또한 동독인들이 통일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셋째, 11월 28일에는 외국의 비난을 각오하면서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하여 통일의지를 명확히 표시하고 이를 기정사실화해 나갔다는 점이다. 콜 총리는 관련국들이 이 계획을 미리 알게 될 경우 반대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고려, 겐셔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미국과만 협의한 후 일방적으로 발표함으로써 베를린장벽 개방을 통일로 연결시켜 나가겠다는 뜻을 공식화했다.


넷째, 국내에서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독탈출자들을 조건 없이 전원 수용함으로써 동독주민의 탈출사태를 통일로 연결시켜 나갔다는 점이다. 1989년 8월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사태가 발생하자 사민당 호르스트 엠케 부총재가 “정부가 난민을 환영함으로써 위기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난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슈피겔지도 “정부가 더 일찍 대사관을 폐쇄했어야 한다”고 비난했으나 동독주민의 제한 없는 수용 원칙을 고수했다.


9월 이후 동독주민의 탈출이 급증하자 야당 사민당과 각 주 정부는 동독주민의 수용제한을 요구했다. 사민당은 동독과의 화해·협력 체제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했고, 각 주 정부들은 격증하는 탈출자 정착지원 부담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 정부는 동독탈출자 58만 2천여 명을 전원 수용함으로써 동독주민들의 ‘발로 이룬 혁명’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자를란트 주지사이며 그 후 사민당 당수가 된 오스카 라퐁텐이 제안한 동독 이주민 억제 제안은 여론조사에서 80%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기민당 지도급 인사들 가운데도 1990년 3월 18일 동독 선거가 끝나면 기습적으로 동독인의 이주를 막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 탈출자를 전원 수용키로 결정한 것은 정치생명을 건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


다섯째, 독일통일 과정의 고비 고비 마다 명쾌한 논리와 설득력으로 통일의 길을 열어 나갔다는 점이다. 동독과 주변국에서 서독정부의 통일의지에 대해 우려를 표시할 때마다 자신은 독일 총리로서 “기본법상의 임무에 충실할 뿐”이라고 답변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반발을 무마해 나갔다.


소련, 영국 및 프랑스가 독일통일에 대한 2차 대전 전승국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때에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규약, 서독 기본법 전문 등의 자결권 규정을 들어 설득, 주변국들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통일 추진 과정에서의 역할


첫째, 국내에서의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통일을 추진해 나갔다는 점이다. 사민당의 오스카 라퐁텐 등 야당 정치인들은 동독과 통합할 경우 서독의 안정된 사회보장 체제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동독 난민의 대거유입에 대한 공포감을 조성하여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서독의 많은 좌파 지식인들도 공개서한과 서명운동을 통해 성급하게 동독을 흡수할 경우 나타나게 될 경제적 부작용과 ‘대(大)독일 민족주의’를 경고하고 나섰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는 “통일론으로 법석을 떨지 말고 국가연합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민당원들이 주도하는 어느 시민단체는 2차 대전 후 동독이 소련에 지불한 7,270억 마르크의 전쟁 배상금을 서독이 청산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 자이트지 발행인인 저명 언론인 데오 좀머는 1989년 8월 콜 총리에게 동독 탈출자 방지와 상호관계의 안정을 위해 호네커를 만나라고 권고했다. 통일 보다는 동독의 보전(保全)을 지원하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콜 총리는 “우리들이 이 운명적 순간에 재정적 이유로 통일을 회피한다면 독일연방공화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적극적인 통일노력을 추진해 나갔다.


둘째, 1990년 2월 6일 야당의 반대와 주변국들의 의구심 유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독일통일 각료위원회와 각 부처 국장급으로 구성된 6개 실무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신속한 통일작업이 가능토록 대비했다.


셋째, 동독사태의 급격한 변화에 신속·정확하게 대응함으로써 동독 공산정권의 위기를 통일로 연결시켜 나갔다. 1989년 12월 드레스덴 방문시 모드로우 동독총리와의 회담에서 조약공동체 구성을 위한 협의와 동독에 대한 적극적 경제지원을 약속함으로써 동독주민들의 통일 열망에 불을 붙였다. 그 후 위기에 처한 동독 정부가 거듭 경제지원을 요구했으나 한번도 민족애의 감상에 빠지지 않고 근본적 개혁을 요구해 나갔다.


특히 1990년 2월 모드로우 동독총리가 본(Bonn) 정상회담에서 150억 마르크의 “연대 지원금”을 요청했을 때 ‘냉랭한 태도’로 거절하면서 신속한 통화·경제동맹 체결을 요구함으로써 모드로우로 하여금 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때 서독 언론과 사민당의 요구대로 동독에 재정지원을 했다면 동독 공산정권은 더 오래 연명되고 독일통일은 그만큼 더 늦어졌을 것이다.


넷째, 통일비용에 대한 우려와 경제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화폐교환 비율을 1:1로 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동독주민들의 통일열기를 부추겨 나갔다. 통일 후에 1:1 화폐교환 비율이 동독경제의 급속한 붕괴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있기는 하나 1990년 2월 여론조사 결과와는 달리 독일연맹이 압도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1:1 화폐교환 비율 약속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승인획득 과정에서의 역할


콜 총리의 치밀한 계획과 적극적 노력이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를 얻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콜 총리는 통일 직전 10개월 동안 부시 미국 대통령과 여덟 번,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는 열 번,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는 네 번을 만나 이들 국가의 동의를 얻어냈다. 콜 총리의 역할을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독혁명 초기부터 정밀한 설득논리와 신속한 외교로 주변국의 우려를 해소해 나갔다. 베를린장벽 붕괴 시에는 독일인들의 환호가 독일 민족주의로 인식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11월 10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장벽붕괴 기념집회 참석자로서는 유일하게 독일국민에게 “신중하고 현명하게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미국, 영국, 프랑스 및 고르바초프에게 감사를 표시함으로써 모든 공(功)을 그들에게 돌렸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우방과 이웃나라들이 동독 소요사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을 때 통일독일이 앞으로 유럽공동체의 일부로서 유럽통합을 발전시키는데 걸림돌이 아닌 이득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심어 주었다.


소련에 대해서는 대규모의 경제지원을 약속하면서 통일독일이 소련의 가장 중요한 경제 파트너가 될 것임을 인식시켜 주었다.


둘째,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2+4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콜 총리는 동독혁명 초기부터 모든 문제를 사전에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는 한편, 소련의 중립화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미국의 요구사항인 통일독일의 NATO 잔류와 오더-나이세 국경선 인정을 즉각 수용함으로써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셋째, 탁월한 교섭력,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 적절한 경제지원 약속으로 독일통일에 대한 소련의 동의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콜 총리는 1989년 6월 고르바초프의 서독방문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소련의 입장을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상호 인간적 유대를 돈독히 한 것이 협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90년 1월 고르바초프의 요청에 따라 7주 동안에 2억 2천만 마르크(약 1,300억 원) 상당의 육류 16만 톤을 지원하고 50억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한 것은 고르바초프와의 신뢰관계를 조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90년 7월 16일 고르바초프의 고향인 코카서스에서의 회담에서 통일독일의 NATO 잔류 등 현안문제를 완전히 타결한 것은 콜 총리의 탁월한 협상능력이 얻은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넷째, 통일과정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신속한 결정을 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대외교섭에 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독 내에서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더-나이세 동쪽 영토의 포기, 통일독일의 NATO 잔류, 통일독일 연방군의 37만 명 수준으로의 감축, 90억 달러의 대소 경제지원 등 어려운 문제들을 신속히 결정함으로써 대외협상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